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겉모습은 화려하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취약하다. 창업자 개인이나 특정 그룹에 대한 높은 의존도, 불투명한 기업 시스템 등이 K팝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엔터 기업의 수익력과 미래 가치가 ‘사람’에 기초하기 때문에 잊을 만 하면 사고가 터진다. 체격은 어른이 됐지만 머리는 청소년 수준인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현실이다.
이번에는 국내 1위 엔터테인먼트 회사 하이브와 K팝 스타 제작자 민희진, 4세대 대표 걸그룹 뉴진스가 얽힌 사고가 터졌다.
경영권 탈취 논쟁에서 무당을 개입한 '주술 경영'으로까지 비난 수위가 높아졌고 욕설과 비난이 난무하는 진흙탕 싸움으로 번졌다.
하이브는 지난 22일부터 어도어를 상대로 내부 감사를 했다. 감사 과정에서 ‘프로젝트 1945’라는 제목의 문건도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하이브는 민 대표가 어도어 경영진들에게 ‘하이브가 보유한 어도어 지분을 매각하도록 하이브를 압박할 방법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본다. 민 대표가 모회사인 하이브의 경영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했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반면 민 대표는 "경영권을 탈취하려는 시도도, 계획도 한 적이 없다"며 "실적을 잘 내고 있는 계열사 사장인 나를 찍어내려는 하이브가 배임"이라고 주장했다.
하이브가 경영권 탈취의 증거로 내건 '문건'을 두고도 입장이 갈린다. 하이브는 문건들이 민 대표가 하이브의 어도어 지분 매각을 압박해 경영권을 손에 넣거나 뉴진스를 데리고 어도어를 나가 별도 회사를 차리는 방안을 준비한 증거라고 보고 있다.
어도어 측은 “실현 가능성 없는 카톡, 개인의 낙서가 감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유출됐다”고 반박했다.
양측의 다툼은 각각 거대 법무법인인 김앤장과 세종의 대리전 양상을 띨 전망이다.
주식 투자자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하이브와 어도어 간 집안싸움이 시작되자 주가는 급락했다. 이번 사태가 촉발된 지난 22일 이후 누적 11%가량 곤두박질쳤고, 시가총액 약 1조 원이 증발했다.
투자자들은 하이브 안에서 터진 내분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네이버 종목토론방에는 '빠른 수습'을 바라는 글들이 연이어 쏟아지고 있다.
민희진, "말만 멀티레이블, 모든 시스템은 중앙에서 통제"
이번 사태는 K팝 산업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으로 번졌다. 가뜩이나 가치평가가 들쑥날쑥한 엔터산업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지인해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이번 이슈의 문제는 ‘엔터업종 센티멘털(정서적·감정적 요소) 훼손’”이라고 말했다.
그는 “엔터업종의 숙명적인 리스크는 인적 리스크”라며 “지금까지 인적 리스크는 아티스트 사건·사고 소식 정도에 국한됐으나 이제부터는 기획사와 프로듀서, 프로듀서와 프로듀서 간 마찰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더 큰 문제는 멀티 레이블 시스템에 대한 의구심”이라며 “민희진 대표가 IP 콘텐츠 유사성을 지적하며 멀티 레이블 확장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이는 시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업종 불확실성’을 키웠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하이브는 ‘멀티 레이블’ 체제 통해 급성장했다. 시스템과 연습생을 갖춘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인수합병(M&A)하며 몸집을 불렸다.
지주사 격인 하이브 아래 빅히트뮤직(BTS), 플레디스엔터(세븐틴), 쏘스뮤직(르세라핌), 어도어(뉴진스), 빌리프랩(엔하이픈) 등 복수의 자회사를 뒀다. 여기에 미국 이타카홀딩스, 힙합 레이블 QC미디어홀딩스, 라틴 레이블 엑자일 뮤직 등을 흡수하며 멀티 레이블 체제를 구축했다.
멀티 레이블은 단일 아티스트에 의존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와 콘셉트를 가진 아티스트로 자원을 분산하고 인기 아티스트의 공백기 없이 꾸준하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민 대표는 지난 25일 기자단담회에서 하이브의 멀티레이블 시스템이 '허울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문제의 핵심은 거버넌스(지배구조)의 문제"라며 "모회사에 IT, 인사, 중앙통제가 가능한 업무가 포진해있다. 그런데 레이블마다 PR의 방법이나 인사의 방법이 다르고 싶을 수 있는데. 중앙에서 통제하고 있다면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은 X친다"라고 지적했다.
또 결정권자인 방시혁 의장이 프로듀싱에서 손을 떼고 레이블 간 건강한 경쟁이 가능해질 수 있도록 투명한 의사결정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 의장이 빅히트와 쏘스뮤직 프로듀싱에 관여하기 때문에 다른 레이블은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받을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민 대표는 이번 사태가 '뉴진스 베끼기'에 대한 내부 고발을 하면서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지난 3월 데뷔한 하이브 빌리프랩 산하 신인 걸그룹 ‘아일릿’의 헤어, 메이크업, 의상, 안무는 물론이고 어도어의 아티스트 운영 방식을 그대로 베꼈다며 이를 문제 삼고 나섰다.
하이브 측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자 하이브가 경영권 탈취로 자신을 몰아간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허울 좋게 겉으로만 멀티 레이블이라고 하면서 뉴진스의 개성을 따라하고 우리만의 제작 시스템을 '기성화' 하는 일이 오히려 주주 이익을 해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K팝 특유의 '소비자 착취 구조' 역시 지적했다.
민 대표는 "업계에서 밀어내기를 알음알음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팬들에게 다 부담이 전가된다. 럭키드로우를 소진해야 하고 팬 사인회를 해야 하고 연예인도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걸 고치기 위해 뉴진스를 시작했다. 이런 꼼수를 부리지 않고 콘텐츠로만 잘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하이브, 26일 경찰 고발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만큼 분쟁은 결국 법정 공방전으로 번질 것으로 보인다. 하이브는 26일 오전 민 대표 등 어도어 관계자들을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이와 관련해 민 대표 측은 '모의'로는 배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반박에 나서고 있다. 민 대표 측 법률대리인 이숙미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배임이라 하면 회사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를 실제 했을 때 성립하는 건데, 그런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를 실제 기도했거나 실행에 착수했거나 하는 행위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민 대표도 하이브가 제기한 '주술 경영' 의혹 대해 개인 사찰이라며 고소를 진행하기로 했다. 민 대표는 이번 사태로 뉴진스의 컴백이 지장을 받은 데 대한 손해배상 청구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