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해로 불리는 2024년의 또 다른 키워드는 ‘여성’이다. 유럽에서는 두 명의 여성 정치인이 정치 판도를 뒤엎고 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와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실질 지도자인 마린 르펜이 그 주인공.
두 여성 정치인의 공통 키워드는 ‘극우’다. 한 명은 ‘여자 무솔리니’라 불리고 한 명은 프랑스 근현대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극우 세력을 ‘주류’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미국 대선에서는 영부인들의 존재감이 치솟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사퇴 요구’가 빗발치는 와중에 정작 대통령의 사퇴 여부를 결정지을 당사자는 질 바이든 여사가 될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출마하지도 않은 전 영부인도 소환됐다.로이터통신과 입소스 여론조사에서는 미셸 오바마 전 영부인의 인기가 바이든 대통령은 물론 트럼프 전 대통령까지 압도했다.
권력 고삐 쥔 질 바이든…
'보그' 등장에 싸늘한 시선
“우리는 계속 싸울 것.”
지난 6월 27일 미국 대선 TV토론 이후 빗발치는 바이든 대통령의 사퇴 요구에 대한 답변을 밝힌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영부인이었다. 질 바이든 여사가 대선 레이스를 이어갈 것이란 의지를 밝힌 매체는 뉴욕타임스나 CNN이 아닌 패션 잡지 보그였다.
7월 1일자로 공개된 보그 8월호 표지모델로 등장한 바이든 여사는 인터뷰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직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의 거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 복귀한 것과 달리 남편을 대신해 사퇴론에 정면 반박한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국 내에서는 바이든 여사가 키를 쥔 ‘게이트 키퍼’라는 비판이 일었다. 뉴욕포스트 편집위원회는 질 바이든의 보그 출연이 그녀가 “권력의 고삐를 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EU ‘빅4’ 중 3명이 여성
유권자 3억7300만 명이 참여한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최고위직 4개 자리 중 3개에 여성이 지명됐다. EU 회원국 국민은 5년마다 유럽의회의 차기 지도자를 뽑고 예산·법률안을 심의할 의원 720명을 결정한다.각 나라 유권자들이 자국(자기 나라)의 선거법에 따라 원하는 정당에 투표하면 그 결과에 따라 각 회원국은 인구에 비례해 할당받은 의석수 내에서 당선인을 나눠 유럽의회 의원으로 보낸다. 이들은 5년간 자국이 아닌 유럽을 대변하는 의원으로 활동한다.
EU 27개국 정상은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EU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새로운 EU 지도부 구성에 나섰다. 우선 EU 행정부 수장에 해당하는 집행위원장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이 후보로 확정되면서 연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 달 유럽의회 인준 투표만 통과하면 폰데어라이엔의 연임이 확정된다. 그가 속한 유럽국민당(EPP)은 중도파로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188석(25%)을 차지하며 총 7개의 정치그룹 가운데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 국방장관 출신의 폰데어라이엔은 지난 2019년 여성 최초로 EU 수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는 무려 7명의 자녀를 둔 워킹맘(일과 육아를 함께하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독일의 중도보수 정당인 기독민주당(CDU)에 속한 그는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다 2005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발탁돼 CDU에 들어가 정계에 입문했다. EU 외교수장인 외교안보 고위대표 후보로는 역시 여성인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로 결정됐다. 칼라스 총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 경제제재에 앞장서 온 유럽 내 대표적인 ‘대러 강경파’ 인사다. 러시아 측 수배자 명단에도 올라 있다.
유럽의회 의장은 몰타 출신 로베르타 메촐라 현 의장이 연임을 노리고 있다. 법률가 출신 메촐라 의장은 2년 전 역대 최연소이자 20년 만의 여성 유럽의회 의장으로 선출돼 주목받았다.
EU ‘빅4’ 중 세 자리가 현재 관측대로 여성 차지가 되면 인구 약 5억 명, 경제 규모 면에서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공동체의 방향을 이끄는 데 ‘여성 파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극우 대모’가 흔드는 유럽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가장 주목받은 여성 인물은 두 명. 이탈리아와 프랑스 ‘극우 돌풍’의 주역으로 불리는 멜로니 총리와 르펜 의원이다. 6월 초에 있었던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사실상 각국 정치권에 대한 중간 평가이자 여론의 심판 성격으로 치러졌다.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고물가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젊은층의 민심이 악화하면서 ‘극우파’로 불리는 정당이 선택받았다.
먼저 이탈리아에서는 2022년 첫 여성 총리로 취임해 국정을 이끌고 있는 멜로니 총리의 정당 ‘이탈리아형제들(FdI)’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멜로니 총리는 반이민 정서를 자극하고 소셜미디어로 적극 소통하면서 이탈리아 내에서 지지율을 높였다.인종주의 정책을 시행하고 한때 독일 나치와 손을 잡은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 전 총리에 대해선 “그가 한 모든 일이 이탈리아를 위해 한 것이라는 점에서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2022년 총리로 집권한 이후엔 EU와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대대적인 감세를 철회하는 등 이념보다 실용을 우선시하는 리더십을 선보였다. 멜로니 총리는 유럽의회 선거 승리 기자회견에서도 “우리에게는 보다 실용적이면서 덜 이념적인 정책을 취하는 유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FdI 소속 청년 당원들의 파시즘 행태를 강력 비판하며 출당까지 경고하고 나섰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FdI가 약진하면서 이들이 속한 극우 정치그룹 유럽보수와개혁(ECR)은 83석을 확보하며 제3 정당에 올랐다. 유럽에서는 ECR이 제3 정당에 등극하면서 멜로니 총리가 EU 집행부의 향방을 결정할 ‘킹메이커’가 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EU 양대산맥인 프랑스에서도 여성 지도자가 극우 진영의 중심에 있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데 이어 최근 치러진 총선 1차 투표에서도 제1 정당으로 올라섰다. 기존에는 RN의 총선 승리가 예견됐지만, 2차 투표에서 좌파 연합과 범여권이 RN을 저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후보 단일화를 이루면서 3위로 밀려났다. 마린 르펜 의원이 실권을 쥐고 있는 RN은 1960년대 말 대규모 학생·노동자 시위가 벌어지며 정치적 불안정과 급진 좌파 운동이 부상하자 극우 세력들이 집결하며 탄생했다.
르펜 의원의 부친인 장마리 르펜이 흩어져 있던 극우세력을 한자리에 모아 1972년 RN의 전신인 국민전선(FN)을 창당했다. FN은 반공주의, 민족주의, 반(反)이민, 반유럽연합(EU) 정책을 내세웠고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 성향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런 극단적인 정치 성향 탓에 초창기 FN은 프랑스 정치권에서 ‘왕따’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2008년 전 세계 금융위기와 경제불황이 닥치면서 FN의 존재감이 부상했다.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불안정은 FN의 반이민, 반세계화, 반EU 기조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마린 르펜은 부친의 뒤를 이어 2011년 당대표에 오르며 극우 ‘탈악마화’ 전략을 썼다.
2018년 당명을 FN에서 지금의 RN으로 바꿨고 당 내부 정화를 위해 급진적이고 논란이 된 인물들을 배제하거나 반유대주의·동성애 혐오 발언 등을 통제했다. 그 일환으로 2015년 “(나치의) 가스실은 2차 세계대전 역사의 일부”라고 말한 부친을 당에서 축출하기도 했다.
정책 노선도 달리했다. 세금 감면, 복지 확대, 프랑스 경제 보호 등 우파보다는 좌파 기조에 가까운 ‘재정 확대’ 포퓰리즘적 정책을 내세워 중산층과 노동 계층의 지지를 끌어올렸다. 또 반이민 기조를 국가안보, 국가 정체성 보호 차원에서 호소하며 최근 프랑스 정치권의 중심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RN이 속한 유럽의회 내 극우 정치그룹 ‘정체성과 민주주의(ID)’ 역시 이번 선거에서 58석을 확보했다.
전문가들은 폰데어라이엔과 멜로니, 르펜의 동맹 여부에 따라 앞으로 5년간 EU의 의제가 어디를 향할지가 결정될 것으로 전망한다.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등으로 인해 유럽은 현재 불안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이런 위험에 대처하려면 EU 수준에서 일관된 리더십이 필요한데 성공 여부는 세 여성(멜로니·폰데어라이엔·르펜)의 선택에 달렸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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