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월가에선 지난해부터 달러 패권과 관련된 논의가 집중적으로 진행됐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대선후보 시절 계속해서 달러 패권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데다 러시아와 중국, 브릭스(BRICS) 소속 국가들이 보유 외화와 결제 통화 다변화를 위해 눈에 띄는 노력을 해와서다. 특히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지면서 달러 패권이 약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불이 붙었다.
전문가들은 탈(脫)달러 움직임의 원천적인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미국이 달러 패권을 활용해 러시아와 이란 등에 금융 제재를 가하면서 다른 국가들에까지 달러 의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다만 유로, 파운드, 위안 모두 유동성, 환율 안정성 측면 등에서 달러에 대응하는 통화로 크기까지는 시간이 상당 기간 걸릴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세계 지배하는 달러
달러 패권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금을 달러에 고정하는 브레턴우즈 체제로 구축됐다. 이후 달러는 80년 동안 세계 무역과 금융시장을 지배해왔다. 애틀랜틱 카운슬이 올해 6월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외환거래의 88%가 달러로 이뤄지고 있으며 수출 송장의 54%가 달러로 표시된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해 말 기준 채권과 대출 등 세계 부채의 64%가 달러로 표시돼 있다고 보고했다.
달러가 이 같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경제의 규모와 안정성이 달러를 뒷받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GDP의 약 26%를 차지하고 있는 데다 개방적인 자본시장을 갖고 있다. 풍부한 유동성으로 외국인 투자자들도 미국 국채를 쉽게 사고팔 수 있다. 국제 결제 시스템인 스위프트(SWIFT)와 국제 결제 청산 시스템인 칩스(CHIPS)를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점도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스위프트의 본사는 벨기에에 있지만 스위프트를 통해 이루어지는 국제 거래 중 많은 부분이 미국 달러로 진행된다. 스위프트를 사용하는 금융기관은 미국 금융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재 200개 이상의 국가에서 약 1만1000개 금융기관이 스위프트를 활용하고 있다. 칩스는 미국에서 운영되는 실시간 총액 결제 시스템이다. 주로 미국 달러로 이루어지는 국제 거래와 대규모 자금 이동을 청산하기 때문에 글로벌 금융 허브로서 미국의 역할을 강화한다.
러시아 제재로 각국 경각심 가져
하지만 최근 세계 각국 정부가 외환거래와 수출입, 국제 결제 등에서의 달러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 확연해졌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미국의 러시아 금융 제재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를 스위프트 결제망에서 제외하고 러시아 국외 자금도 동결시켰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한때 국가 부도 위기를 겪기도 했다. 2022년 만기 국채 이자와 원금을 해외 예치금으로 상환하려 했지만 미국 투자은행 JP모간체이스가 미국 재무부의 지시로 결제 처리를 거부하면서 채무 불이행(디폴트) 위험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국내 달러 보유고에서 상환에 필요한 자금을 겨우 조달했다.각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했지만 이 같은 자금 경색을 보고 달러 패권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됐다. 미국과 등을 지게 되면 언제든지 해외 자산이 동결되고 스위프트 결제망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지난 7월 한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대한 제재와 수출 통제가 길어지면서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역할이 잠식될 가능성을 인정했다. 특히 중국은 이전부터 위안화 국제화와 디지털 기축통화 구상 등을 통해 달러 패권에 도전했던 터라 러시아가 받은 금융 제재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미국과 무역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금융 제재도 언제든지 받을 수 있어서다.
중·러 주도로 달러 패권 도전
국제 결제 시스템에서 제외된 러시아와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하는 중국의 니즈는 서로 맞아떨어졌다. 실제 중국과 러시아 간 위안화 사용이 최근 몇 년간 급증했다. 엘비라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장은 지난 1월 말 러시아 관영 RIA 통신과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위안화 결제 비중이 2년 전과 비교해 수출은 0.4%에서 34.5%, 수입은 4.3%에서 36.4%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중국 국가외환관리국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7월 중국이 각국과 국제 거래에서 사용한 통화의 53%는 위안화였다. 2021년 7월 40%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3년 새 위안화 비중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탈달러 움직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근 러시아·중국 주도의 신흥경제국 협의체인 BRICS 소속 국가들은 회원국 간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CBDC는 실물화폐를 대체하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다.
중국과 러시아의 이 같은 움직임은 BRICS 소속의 다른 국가들의 호응을 얻는 중이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해 “나는 매일 밤 자문한다. 왜 모든 국가가 달러로 거래해야 하는가”라며 탈달러 금융질서 구축을 촉구했다. 또 다른 BRICS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도 최근 CBDC 프로젝트에도 참여한다고 밝혔다.이 밖에 원유 수입국들은 저렴한 러시아산 원유를 달러가 아닌 통화로 결제하기 시작했다. 6월 인도 세계 최대 정유단지 운영사인 릴라이언스인더스트리는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 가스프롬의 석유를 1년간 루블화로 결제하기로 했다. 중국은 사우디의 원유를 위안으로 결제하는 페트로 위안 체제를 추진 중이다.
이 같은 각국의 탈달러 움직임은 세계 중앙은행들의 외화보유액 가운데 달러 비중을 보면 나타난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따르면 2000년 70%를 넘긴 각국 중앙은행 외화보유액의 달러 비중은 지난해 58%까지 떨어졌다.
위안화, 국제화까진 시간 걸릴 듯
탈달러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가 단기간에 무너지진 않을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HSBC가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각국 중앙은행들은 중국 위안화나 유로화와 같은 세계 주요 경제 대국들의 통화를 달러 대체 통화로 선택하기보다는 신용등급이 높은 소규모 경제의 통화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호주 달러, 캐나다 달러, 한국 원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 HSBC는 “이들 통화는 중앙은행에 소규모 개방 경제에 대한 분산 효과를 제공하며 디지털 거래 기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자산을 보유하기가 이전보다 훨씬 쉬워졌다”고 분석했다.무엇보다 위안화와 유로화의 경우 극복해야 할 점들이 있다. 유로존의 경제 규모는 크지만 자본시장이 통합되지 않았다. 유로존 회원국 중 AAA 신용등급을 가진 국가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유로화 국제 준비통화로서 더 큰 역할을 감당할 만큼 유동성이나 자산 풀이 충분히 깊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위안화 역시 유로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중국의 금융시장은 기축통화 지위를 뒷받침할 만큼 충분한 유동성을 제공하지 못하며 외국인 투자자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배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 교수는 HSBC의 보고서를 통해 “역사적으로 모든 주요 기축통화는 공화국 또는 민주주의 국가의 통화였으며 정부의 독단적인 행동을 견제할 장치가 존재했다”고 지적했다.다만 미국의 재정 상황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2034년에 사상 최고치인 116%에 도달하고 2054년에는 172%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내 정치적 양극화가 재정 긴축을 실행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의 급증하는 재정적자는 국채 발행을 늘리고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실제 지난해 무디스는 미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조정하면서 정치 양극화와 이에 따른 정책 불확실성을 지적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미국에 즉각적인 재정 위기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먼 미래에는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