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다가오면서 주요 기업의 사외이사 영입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신규 사외이사 후보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외이사는 외부 전문가로 경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기업 경영을 감독하는 동시에 경영진에 경영 조언을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업들이 사업 전략과 방향성에 맞춰 사외이사를 선임하기 때문에 사외이사들을 보면 기업의 사업 방향성을 읽을 수 있다.
삼성, 불확실성 대응 위해 경제관료 출신 선임
삼성은 미·중 갈등과 전쟁,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며 경제관료 영입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3월 20일 주총을 열고 금융위원장을 지낸 신제윤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을 사외이사로 선임할 예정이다.
삼성전자 이사회는 추천 사유로 “최근 시시각각 변하는 글로벌 경제 흐름 속에서 리스크를 관리하고 전략적인 제안이 중요해진 만큼 신 후보는 금융·재정 전문가로서 회사의 자금 운용 및 글로벌 전략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전문적인 조언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삼성중공업은 윤상직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사외이사 및 감사로 신규 선임한다. 윤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 초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고, 20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공천으로 부산 기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21대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했고 현재 법무법인 율촌의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삼성중공업은 “최근 탈탄소 및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조선·해양 산업에서 윤상직 후보의 경험과 식견은 회사의 정책 수립 및 의사결정 과정에서 발전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전기는 정승일 전 한국전력공사 사장을 사외이사 후보로 내정했다. 정 전 사장은 한국전력공사와 한국가스공사의 사장을 역임한 에너지산업 분야 전문가다. 현재 트러스톤자산운용의 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삼성SDS는 이인실 전 통계청장을, 삼성엔지니어링은 신경택 전 수출입은행 부행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할 예정이다.
‘재무통·여성·외국인’ 모시는 현대차
현대차그룹은 이사회에 자본시장 전문가, 재무통 영입에 집중하고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최현만 전 미래에셋증권 회장을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으로 영입한다.
최 전 회장은 1989년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서 일하다 1997년 박현주 회장과 함께 미래에셋금융그룹을 창업한 인물이다. 이후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이사, 미래에셋벤처캐피탈 대표이사,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 등을 역임한 자본시장 전문가다. 최 전 회장은 현대글로비스에서 주주권익보호 담당 사외이사를 맡을 예정이다.기아는 이인경 MBK파트너스 부사장(CFO)을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이로써 기아의 사외이사진은 조화순 교수, 전찬혁 세스코 대표이사 회장, 신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신현정 KAIST 기계공학과 교수, 이인경 부사장 등 총 5명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이 중 여성은 조화순·신현정 교수, 이인경 부사장 등 3명이다. 이 부사장의 합류로 기아의 여성 사외이사 비율은 현대차그룹에서 최초로 50%를 넘게 된다.
외국인 사외이사 후보도 눈길을 끈다. 현대모비스는 케네스 위텍 텐스토렌트 최고전략책임자(COO)를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했다. AMD, 테슬라, 구글 등에서 활동한 반도체, 소프트웨어(SW), 인공지능(AI) 산업 전문가인 만큼 현대모비스가 추진 중인 전장화와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 전략에서 실질적인 조언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대통령 50년 지기’ 영입한 HD현대
HD현대중공업의 조선업 중간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윤석열 정부 초대 국가안보실장을 역임한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을 사외이사(감사위원)로 영입한다.
김 전 실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외교통상부 제2차관을 지냈으며, 윤석열 정부 초대 국가안보실장을 맡았다. 김 전 실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광초 동창으로 50년 지기로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대선캠프와 인수위원회에서 윤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을 설계했고, 미국 국빈 방문을 비롯해 외교·안보 일정을 총괄해오던 중 2023년 3월 사퇴했다. 현재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HD한국조선해양은 “전체 매출의 약 90%가 해외에서 이뤄지고 각국 보호무역 기조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김성한 후보자가 가진 외교·통상 분야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은 회사 경쟁력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고 영입 배경을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오는 11월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통상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대관 능력 강화 차원으로 보고 있다.
HD현대인프라코어는 올해 주총에서 성윤모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석좌교수를 사외이사로 선임한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특허청장을 역임한 산업기술 전문가인 성 석좌교수는 효성의 사외이사도 맡고 있다.
에쓰오일은 고승범 전 금융위원장을 신규 사외이사 후보로 내정했다. 고 전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금융위원장을 지냈다. 금융위에서 요직을 거치며 거시경제 분야 정책과 금융산업 관련된 정책을 두루 익힌 정책전문가로 꼽힌다.
LS일렉트릭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으로 선임한다. LS일렉트릭은 “윤증현 후보자는 제2대 기획재정부 장관, 제5대 금융감독원장을 역임하며 금융 전문가로서 다양한 대내외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며 “금융 분야의 핵심 전문가로서 합리적으로 회사 경영을 감독하며 이사회 및 감사위원회의 의사결정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관 입김 막는 방패막이 우려도
일각에서는 전·현 정부의 고위 관료 출신들이 주요 기업 사외이사로 선임되는 풍토에 대해 경영 감시보다는 정권과의 교감이나 관의 입김을 막는 방패막이로 삼으려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자산순위 상위 30대 그룹에서 사외이사를 둔 237개 계열사의 사외이사 827명의 이력을 분석한 결과 177명(21.4%)이 2곳 이상 기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겸직 사외이사 경력을 보면 현직 교수가 72명(40.7%)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관료 출신이 56명(31.6%)이었다. 관료 출신 사외이사의 출신 부처는 국세청·검찰 각 10명, 산업통상자원부 9명, 기획재정부 7명, 사법부·공정거래위원회 각 5명 순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규제정책 등과 관련해 정부와의 대외 협상력을 높이고 대관 업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고위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여전히 선호하는 추세”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