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체제’ 한국, 우크라 특수 패싱되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종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 만에 막을 내릴지 주목된다. 취임 전부터 전쟁의 조기 종전을 공언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장기화된 전쟁이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했다.
지난 2월 18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미·러 고위급 회담을 열고 우크라이나전 종전 방안을 놓고 협상을 본격화했다.
지난 2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를 즉각 시작하자는 데 합의한 지 불과 엿새 만에 발 빠르게 이뤄진 것이다.
트럼프·푸틴 전화 한 통에 재건주 ‘들썩’
종전 협상이 시작되자 시장은 빠르게 반응했다. 미·러 양국 정상이 종전 협상에 착수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월 13일 유가증권시장(코스피)에서 HD현대건설기계, 전진건설로봇, HD현대인프라코어, 대동 등 우크라이나 재건 수혜주로 분류되는 종목들이 급등했다.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 규모는 총 9000억 달러(약 13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제2의 마셜플랜’으로 불리는 이유다. 마셜플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유럽 재건을 위해 약 130억 달러를 투입한 원조 계획이다.한국의 건설, 기자재, 전선, 원전기업들의 진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23년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이끈 한국 재건협력대표단을 만나 원전, 방산, 자원개발, 재건사업 등 4대 분야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국내 기업들의 재건 사업 참여에 따른 수혜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며 업계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과거 이라크 재건 사업에 참여한 이력이 있어 진출이 유망하며 건설사와 건설기계, 에너지 등 분야에서 직간접적인 수혜가 예상된다.
기업들은 2023년부터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사업 참여를 타진해왔다. 현대건설은 보리스필 국제공항공사와 공항 재건사업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삼성물산은 르비우시와 스마트시티 개발협력 MOU를 체결했다.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지난해 9월 키이우에 지사를 설립하고 현지 딜러망과 네트워크를 유지해왔다. 2019년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항 인근에 곡물터미널을 준공한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현지 터미널 가동 정상화에 대비해 현지 영농기업을 접촉하며 종전에 대비한 추가 사업 기회를 보고 있다.포스코인터내셔널은 2023년 비탈리 김 미콜라이우 주지사와 ‘스틸 모듈러 제조시설’ 설립을 위한 MOU를 체결한 만큼 현지에서 식량에 이어 인프라 분야까지 사업 영역 확대를 노리고 있다.
재정 60% 해외 원조에 의존…미수금 우려
다만 초기 협상에서 배제된 우크라이나의 동의가 실제 휴전에 필수적인 데다가 부수적으로 유럽 국가들의 입장까지 감안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재건사업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재건사업 특성상 각종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점은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이날 종전 협상에는 전쟁을 치르는 직접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는 일단 ‘패싱’됐다. 미국 주도의 종전 협상에 대해 유럽 국가들은 유럽 각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종전 논의에서 배제된데 대해 불만이 커지고 있다.
당사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물론 미국과 유럽 등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실제 종전까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얘기다. 특히 재건의 범위가 복구를 넘어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등이 포함된 만큼 회원국의 동의를 얻는 과정도 필요하다.막대한 복구 비용을 조달하는 문제도 남아 있다. 세계은행(WB)과 EU 집행위원회 등은 우크라이나 피해복구와 재건에 필요한 비용을 최소 4860억 달러(약 670조원)로 추산하고 있다. 인프라 부문 148억 달러, 생산 부문 136억6000만 달러, 사회 부문 161억8000만 달러 등이다.
종전 시점이 미뤄질수록 비용은 더 커질 전망이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정부 예산 중 약 60%를 해외 차관과 무상원조로 충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막대한 재건 비용을 해외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업 추진과 관련된 미수금 문제 발생 가능성 등 불확실성과 리스크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서 한화 건설부문은 이라크 전쟁 이후 비스마야 신도시 공사를 2012년 시작했으나 이라크 정부가 대금 지급을 미루면서 수천억원의 미수금이 발생해 2022년 결국 공사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2023년 미수금 일부인 3억 달러를 수령하고 부분 공사를 재개한 한화 건설부문은 2024년 12월 비스마야 신도시 공사의 발주처인 이라크 국가투자위원회(NIC)와 공사 재개를 위한 변경계약을 체결해 현재 잔여 7만여 가구 건설 재개를 추진 중이다.
우크라이나 현지에선 전쟁으로 전력, 에너지 관련 50여 개 이상의 발전소와 변전소가 손상돼 전력망과 송배전선 재건에만 최소 57억 달러(약 8조2000억원)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전선 및 전력기기 업계의 수혜도 예상된다.석유화학은 종전으로 값싼 러시아산 원유 수입 재개 시 원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고 재건사업으로 석화업계 실적 악화에 큰 영향을 준 중국발 공급과잉 현상이 해소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 아직 못 만난 권한대행, 우선순위서 밀리나
하지만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로 정상외교가 실종된 상황에서 협상력 약화도 문제다. 한국이 재건 특수에서 패싱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과 종전 협상을 주도하는 트럼프 신정부 간 소통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다.
엄구호 한양대 국제대학원 러시아학과 교수는 “원전, 발전소 건설 사업은 정부간 계약 성격이 강한 정부대정부(G2G) 사업인데 소극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밖에 없는 대행체제에서 ‘팀코리아’의 협상력이 약해질 수 있다”며 “재건 사업의 경우 정부 간 협의된 사항을 가지고 기업과 협의할 가능성이 크고, 미국·유럽과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 종전 협상 타결 전이라도 재건사업에 관한 협의에 속도를 내야할 것”이라고 진단했다.한국토지주택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진출을 위한 전략 수립 연구’ 보고서에서 “다수의 재건사업이 발주될 가능성이 높고, 우크라이나 정부도 외국인 투자를 환영하는 입장”이라면서도 “다만 미국, EU 등이 강한 지원 의지를 가지고 있어 재건 사업 참여와 관련해 경쟁이 심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월 14일 독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현재 전쟁 비용의 80%는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20%는 미국이 부담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우크라이나 재무부에 따르면 2022~2024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가별 경제원조 지원 규모는 EU가 448달러로 가장 많았고 미국(312억달러), 국제통화기금(IMF·124억 달러), 일본(85억 달러), 캐나다(54억달러), 세계은행(WB·52억 달러), 영국(30억 달러), 독일(16억9000만 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은 지난해 4월 제5차 우크라이나 지원회의에서 중장기적으로 21억 달러 규모 대외협력기금(EDCF)를 우크라이나에 집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과 유럽의 경제원조 규모와 비교해 한국의 지원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만큼 재건 사업 수주에서 우선순위가 밀릴 수 있다는 우려다.
‘대행체제 韓’ 협상력 약화 우려…러시아와도 협상 채널 만들어야
조기 대선 가능성에 따른 정권 교체 여부도 재건 사업 추진 동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은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 시절인 2023년 9월 국토부가 삼성물산, 현대건설, HD현대건설기계, 네이버, 포스코, 한화솔루션 등 경영진들로 구성된 민·관 합동 우크라이나재건협력대표단(원팀코리아)을 꾸려 키이우 지역 스마트 교통 마스터 플랜, 중부 우만시 스마트시티 마스터 플랜, 보리스필 공항 현대화 사업 등 6대 선도 프로젝트를 발표한 바 있다.
이제 세부 계획을 추진해야 하지만, 국토부 장관이 교체되며 해당 프로젝트가 다소 시들해진 상황이다. 문제는 전쟁 장기화로 재건이 시급한 동부지역 대부분이 이미 러시아에 점령됐다는 점이다.그동안 한국 측은 우크라이나 정부, 서방 국가들과 재건사업 협상을 해왔기 때문에 러시아와도 협상 채널을 만드는 게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연구위원은 “한국과 러시아 간 교류를 회복해 러시아 점령 지역의 재건 사업에 참여해야 하는데, 한국 기업들이 구축해놓은 민간 네트워크를 활용한 러시아 기업과의 물밑 협상도 필요하다”며 “대행체제에서 민간기업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선 전쟁 보험, 무역 보증 등 위험 완화 수단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재건사업의 성공적 진출을 위해 EU나 폴란드 등 재건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국가와의 협력도 고려해야 한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삼일PwC는 ‘리빌딩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재건사업과 국내 기업의 기회’ 보고서에서 “EU와 폴란드 등의 주요 기업체와 공동 프로젝트나 컨소시엄을 통한 진출이 적합하다”며 “국내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사업 기회가 많고 정부 지원이 적극적인 일본의 상사나 건설사와 공동 프로젝트 수주 등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엄구호 교수는 “우크라이나 측의 상환 능력, 공공부문 부패로 인한 합의 사항 불이행 리스크 등을 사전 검토하는 등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며 “리스크 헤징을 위해 세계은행(WB), 다자개발은행(MDB) 등과 협력 사업을 개발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