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져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긴커녕 어퍼컷 날린 거 아녜요?”
한밤의 비상계엄에 대한 분노는 대단했다. 자산운용사에서 펀드매니저로 근무하는 A 씨는 한국 경제의 취약성에 정치 리스크까지 안겼다며 작금의 상황을 ‘KO’에 비유했다. 증권사 투자전략 팀장 B 씨도 “밸류업을 한다더니 밸류다운이 따로 없다”고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기자가 만난 시장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번 사태에 이 말을 전했다. “안 그래도 경기가 안 좋은데….”
1%대 저성장이 코앞으로 다가온 불안한 경제, 거기에 덮친 불신의 정치, 그렇게 다가온 불확실의 시대. 한국 경제에 복합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① 저성장
깜짝 인하에 날린 어퍼컷
“성장의 하방압력이 증대됐다. 이에 따라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해 경기의 하방리스크를 완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지난 11월 28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깜짝 금리인하를 결정했다.
한은이 2회 이상 연속 금리인하를 결정한 것은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일 정도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애널리스트 중에 한은의 추가 인하를 예상하는 이는 드물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말했다.금통위가 결단을 내린 배경에는 한국 경제의 저성장 문제가 있었다. 달러당 1400원대 강달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성장의 하방압력이 높아졌다. 금통위원들은 “앞으로도 국내 경제는 소비가 완만한 회복세를 이어가겠으나 수출 증가세는 주력 업종에서의 경쟁 심화,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으로 당초 예상보다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경제 전문가들을 놀라게 한 건 한은이 이날 함께 발표한 수정 경제 전망치. 한은은 올해 연간 경제성장률을 2.2%로 8월 전망치(2.4%)보다 0.2%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내년 성장률 전망치는 잠재성장률(2.0%)보다 낮은 1.9%를 제시했고 내후년은 더 낮은 1.8%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봤다.
통상적으로 한국의 잠재성장률로 여겨지는 수준은 2%다. 1%대 성장률을 2년 연속으로 내다본 건 한국이 저성장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저성장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일본, 유럽의 주요국과 유사한 흐름이었다. 이들 국가는 오랜 기간 1%대 경제성장률을 경험했다. 인구 고령화, 생산성 정체, 낮은 투자율 등의 구조적 요인은 장기간 침체에 빠져들게 해 심지어 0%대에 머무는 해도 많았다. “한국이 일본과 같은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하는 게 아니냐”는 불안이 커졌다.“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결정” 끝에 한은 금통위가 금리를 추가 인하했지만 정작 변동성을 확대시킨 것은 정부였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원·달러 환율은 4일 장 마감 기준 1402.90원 수준에서 1442원까지 치솟았다. 전례없는 원화약세에 이 총재를 비롯해 거시경제를 담당하는 주요 인물 4인이 당분간 주식·채권·단기자금·외화자금시장이 완전히 정상화될 때까지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정치적 문제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이를 국민의 돈으로 막아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일각에선 정부와 한은이 시장에 공급하게 될 자금 규모가 최대 60조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내년 예산안이 총 677조4000억원 규모로 편성됐으니, 대략 산출하면 8.86% 규모다.
시장의 신뢰는 더욱 악화됐다. 앞으로 정부가 쓴 경제정책의 실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똑같은 정책이라도 실효성을 갖추려면 더 많은 자산을 투자할 수밖에 없게 됐다.
② 강달러
외환 시장에 날린 어퍼컷
비상계엄 선포는 외환시장에 깊은 충격파를 남겼다. 이코노미스트 C 씨는 3일 밤 원·달러 환율이 1428원을 찍으며 수직으로 치솟는 모습을 모니터로 지켜봤다. “정치적 혼란이 경제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며 한숨을 내뱉은 그는 올해 초부터 이어진 대내외 불확실성에 이번 사태가 결정타로 작용할 것을 우려했다.
펀드매니저 D 씨 역시 일본에서 속보를 접하며 “도대체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는 해외 투자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았다.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 외국인은 현물과 선물 시장에서 총 6426억원어치를 매도하며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이날 코스피는 장중 한때 2.31% 하락했고 1442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가까스로 1410원대를 기록했다.그러나 1차 저지선으로 여겨지던 1420원이 한 번에 뚫리면서 시장의 불안감은 극대화됐다. 외환 당국이 다양한 조치를 통해 유지해왔던 마지노선이 무너진 순간 시장 참가자들은 “언제든 1500원대까지 돌파할 가능성이 있다”는 공포감을 품게 됐다.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하겠다”는 당국의 말에 비추면 이 과정에서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액을 대거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현재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12월 4일 기준 약 4153억 달러로 집계되지만 전문가들은 외환보유액이 4000억 달러 아래로 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고 경고했다. 이미 지난 11월 외환보유액은 달러 강세 등 영향으로 3억 달러 감소하는 등 두 달 연속 줄어들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환율 변동성과 외환보유액 감소가 심화되면 한국 내 자산을 매도하고 자본을 본국으로 회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리스크가 외환시장에 남긴 상흔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③ 코스피
박스피에 날린 어퍼컷
“그냥 닫읍시다 제발ㅠㅠ”비상계엄 선포가 있던 밤 한국거래소는 다음 날 휴장 여부를 고민했다. 원·달러 환율이 요동치고 코스피야간지수가 큰 폭으로 하락하자 시장의 충격을 우려한 것이었다. 개인투자자들은 쏟아지는 속보기사에 “제발 닫아달라”는 댓글을 남기며 혼란스러운 심정을 드러냈다. 당시 ‘시장 붕괴’가 예견되는 상황에 추가적인 손실을 막기 위해 시장의 일시적 폐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계엄령이 6시간 만에 해제돼 증시는 정상 개장됐고 붕괴도 면했지만 당분간 초유의 사태가 금융시장에 미칠 충격은 ‘시계 제로’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정치 리스크가 터지기 전 코스피는 기관과 외국인의 매수세로 2500선을 회복했다. 3거래일 만의 탈환이자 외국인의 모처럼 강한 순매수였다. 그러나 상승세는 비상계엄 리스크에 주저앉았다. 다시 단기 변동성은 확대됐다.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거래소에서 국내 증시 부양을 약속했다. 투자자들에게 세제 지원을 강화해 증시에 도는 자금을 불리고 기업들엔 주가 부양 노력을 사실상 의무화하는 게 골자였다. 이름은 밸류업 프로그램,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가 주목적이었다.
‘3000 시대’를 열었던 2020~2021 코로나 시대를 제외하면 ‘박스피’ 세월이 근 15년이었다. 2007년부터 2024년까지 17년의 코스피 수익률은 39.6%였다. 1년에 2.2%씩 오른 셈이다. 평균 물가상승률(3%대)보다 낮다. 저축은행에 넣어뒀으면 주식에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이자를 받았을 게 분명하다. 엄청난 ‘디스카운트’다.
그사이 세계 주요국 증시는 사상 최고치를 보이며 한국 주식시장의 초라함을 더했다. 특히 트럼프 쇼크에도 글로벌 증시는 상승세를 이어가는데 한국 증시만 ‘나 홀로 약세’를 보였다. 투자자 사이에선 “살 만한(매력적인) 주식이 없다”는 불만과 조롱이 뒤섞였다. ‘안전자산’처럼 여겨진 코스피 대장주 삼성전자의 약세도 투자자들의 신뢰 상실을 부추겼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시행된 지도 10개월. 12월 현재 ‘산타 랠리’는커녕 한국 증시에 밸류업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계엄령 해제 이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정치 불확실성이 시장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은 부담”이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도 보고서를 통해 한국 경제를 둘러싼 거시적 환경이 우호적이지 않은데다, 이번 사태로 인한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존 권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는 “한국 증시의 밸류에이션은 매력적인 수준까지 하락하긴 했다”면서도 “리레이팅을 위한 ‘명확한 촉매(clear catalyst)’가 없는 한 낮은 수준에서 머무를 것으로 본다”고 선을 그었다.
골드만삭스는 국내 증시 투자자들에게 △방산 종목 △주주환원 및 지배구조 개선 종목 △코스피200 저평가 중소형(SMID) 종목 △거시탄력성이 높은 종목 등에 투자할 것을 권했다.
④ 트럼프
한·미 동맹에 날린 어퍼컷
미국에선 현 바이든 행정부가 계엄령 발표에 사전 통보조차 받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로 불거졌다. 뉴욕타임스(NYT)는 “한·미 동맹이 수십 년 만에 최대 시험에 직면했다”며 바이든 행정부가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놀란 것으로 보였다는 반응도 보도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계엄령 선포 몇 시간 만에 낸 짧은 성명에서 “미국은 이 발표를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며 “우리는 한국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 전개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밝혔다.
내년 트럼프 정부의 키맨으로 불리는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 장관 내정자(테슬라 CEO)의 한줄평도 향후 대미외교 및 무역의 관계에 대한 불확실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계엄령 선포에 놀라는 트윗에 ‘this is shocking’이란 회신을 보냈다. 안 그래도 트럼프 행정부의 재출범이 한국 경제에 새로운 변수가 되는 상황에서 대외 신인도의 약화는 좋지 못한 변수였다. 특히나 트럼프는 공공연하게 한국이 주한미군 주둔비용(방위비 분담금)으로 연간 100억 달러(약 13조원)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 인물. 100억 달러는 한·미 당국이 합의한 액수의 9배에 육박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고 분담금을 둘러싼 한·미 간 진통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이번에 사전 통보받지 못한 계엄령 발표가 압박카드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트럼프가 한국을 향해 내세웠던 고율 관세 부활이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한국 기업들을 압박할 가능성도 점쳐진다.머스크와 같은 혁신적이지만 직설적인 인물이 정부 요직에 임명된 점은 한국 경제의 전략적 대응이 더 까다로워질 것을 암시한다.
미즈호증권 아시아 매크로 리서치 책임자인 비슈누 바라단은 “트럼프 당선인의 복귀가 외부 요인으로 작용해 (한국의)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며 “미국이 한국에 부과할 수 있는 관세가 수출 중심 경제인 한국에 큰 불확실성을 남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계엄령이 신속히 무효화됐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은 피했으나 한국 내 상황과 트럼프 2.0에 대한 명확성이 확보되기 전까지 한국의 자산이 부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⑤ 관세와 공급과잉
산업계 기대에 날린 어퍼컷
당장의 더 큰 화는 롯데, 포스코와 같은 국내 굴지 기업들의 위기다. 이들의 위기가 미·중 갈등의 격화 한가운데에 있는 만큼 경제계의 우려는 크다.
포스코는 지난 11월 19일 45년 넘게 가동해온 포항제철소 1선재공장을 전격 폐쇄했다. 지난 7월 포항 1제강공장 폐쇄에 이어 4개월여 만에 두 번째 셧다운 결정이다. 1제강공장은 1973년 준공돼 반세기 동안 약 9500만 톤의 조강을 생산하며 조선, 자동차, 가전 등 국내 제조업을 일궈 한국 경제의 밑거름이 됐지만 중국산 저가 밀어내기의 직격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중국산 덤핑에 철강 양대산맥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실적 부진을 겪고 있다.
롯데 사태는 더 심각하다. 중국의 덤핑에 이기는 전략으로 똑같이 치킨 게임에 도전했지만 정부 지원금을 등에 업은 중국의 공격적 증설을 막아낼 수 없었다. 롯데의 ‘캐시카우’ 역할을 했던 롯데케미칼은 단숨에 ‘돈 먹는 하마’로 전락했다. 2022년에 7000억원 넘는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고 영업적자는 내년 혹은 2026년에도 이어질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나온다. 최근 ‘롯데 유동설 위기’의 진원지엔 롯데케미칼이 있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중국의 저가 밀어내기 공세로 국내 기업 10곳 중 7곳이 매출이나 수주에 영향을 받았거나 향후 피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기업이 해외 수입품에 대해 신청한 반덤핑 제소 건수가 통상 연간 5∼8건인데 비해 올해는 상반기에만 6건이 신청됐다.
중국의 덤핑 문제는 산업 전 영역으로 치닫고 있다. 여기엔 금속과 섬유부터 전기자동차, 리튬배터리, 반도체와 같은 최첨단 제품에 이르기까지 산업 전방위를 막론한다. 이미 몇 기술은 한국을 앞지르거나 비슷한 수준에 다다랐다.
중국의 산업정책은 ‘중국제조 2025’와 ‘자급률 제고’ 전략에 따라 추진되고 있어 공급과잉은 앞으로 장기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제2의 롯데케미칼과 포스코 등 피해 기업이 속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독일의 중국 연구기관인 메릭스는 ‘메이드 인 차이나 2025’라는 보고서에서 제조업 의존도가 높고 첨단산업 비중이 높은 한국과 독일 등이 중국 전략에 가장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열 2025년은 공급과잉 문제를 보다 가속화할 전망이다. 이미 중국은 미국의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에 희유금속과 초경질재료의 대미 수출 금지로 즉각 응수하면서 G2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주요국들은 보호무역주의 조치를 강화하며 중국의 공급과잉에 대응하고 있다. 미국은 반덤핑과 고율의 관세로 맞서고 있으며, 유럽연합(EU)은 전기차·태양광·풍력터빈에 대한 보조금 조사에 착수했다. 동남아시아 또한 중국에 관세 장벽을 세우거나 오히려 중국 기업의 미국향 ‘뒷문(백도어)’ 역할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무역구제 측면에서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한 전향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여기엔 정부의 협상력과 대통령의 외교력이 뒷받침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치적 내홍에 휩싸인 윤 대통령이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전문가들은 의구심을 찍는다. 비상계엄과 같은 정치적 혼란이 외교적 신뢰를 훼손하며 한국을 관세 협상에서 더 불리한 위치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⑥ 리더십
국민 기대에 대한 어퍼컷
불안한 경제, 불신의 정치, 불확실의 시대…. 그야말로 국가적 비상 상황이지만 타개책은 마땅치 않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56개 전국상의 회장단은 “저출생·고령화, 글로벌 공급망 변화 등 복합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개별적인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접근에서 나아가 모든 문제를 동시에 풀어내기 위한 일석다조의 해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복합 위기의 한가운데 서 있다. 저성장, 저출생·고령화,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와 자영업의 위기, 글로벌 공급망의 변화 등 경제적 위기가 일상을 잠식하고 있지만 정치적 리스크는 이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는 폭탄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적 위기에 늘 구원투수는 있었다. IMF 위기 때는 국민적 금모으기 운동,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정부의 시스템(외환보유고)이,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동학개미 운동이 경제를 지탱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고립된 상태다.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로 “자유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키겠다”고 선언했지만 정국은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회는 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며 민주적 절차를 작동시켰지만 정치적 내홍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