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국무부 "계엄 심한 오판(badly misjudged)"
외교일정 줄줄이 차질
산업·민생 정책 올스톱
1월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서는데
한국은 '리더십 공백'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연초 정치가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로 ‘폴리코노미’란 단어를 올해의 키워드로 제시했다. 미국 대선, 한국·영국·일본 총선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선거로 인해 경제도 영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었다.
예상대로 정치적 격변에 세계경제는 요동쳤다. 한국은 수많은 대외변수의 희생양이 됐고 그 영향으로 국내 주가는 맥을 못추고 있다. 이 상황에 또 다른 돌출 변수가 튀어나왔다. 비상계엄 사태다. 폴리코노미의 대미를 한국이 장식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6시간 계엄 사태’ 후폭풍이 거세다. 자본시장의 근간인 신뢰가 무너졌고 정국 혼란으로 정치와 국제관계 변수는 더 복잡해졌다.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지 6시간 만에 국회의 해제요구 결의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계엄 선포 이유부터 과정, 이후의 시나리오까지 큰 의문이 남았다.
윤 대통령은 이번 사태가 잇단 탄핵 소추와 예산 삭감 등 야당의 ‘반국가행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야당을 ‘척결’의 대상으로, 전공의는 ‘처단’의 대상으로 삼으며 반민주적인 계엄을 선포했고 외신 역시 이를 ‘정치적 자살행위’로 간주했다.
10%대 지지율인 윤 대통령의 향후 거취, 리더십 공백으로 인해 정국은 더 큰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당장 정치권과 각계에서 퇴진과 탄핵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윤 대통령과 국방부,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신속히 처리하기로 했다.
국민의힘은 국방부 장관 해임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대통령실 실장 3인과 수석비서관들은 전원 사의를 표했다. 일부 국무위원도 사의를 밝혔다. 한국 대외신인도는 크게 훼손됐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주요 국가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 여행 주의보를 내렸다. 그동안 K팝과 한국 드라마, 한국 문화가 쌓은 국가 호감도마저 흔들릴 수 있다.
대통령이 45년 만에 소환한 비상계엄령은 정치가 경제를 흔드는 ‘폴리코노미’의 끝판왕이었다.
정치적 혼선…최소 6개월 이어질 혼란정국
향후 정국과 관련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시나리오도 한국 경제에 긍정적이지 않다.
현재 국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탄핵부터 살펴보자. 국민의 신뢰를 잃은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온다 해도 리더십 공백은 한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내수경기는 침체하고 국제 정세는 자국 우선주의로 치달으며 위기가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리더십 공백은 국가 경쟁력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게 중론이다. 대통령 권한 대행체제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다. 공무원들이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책임 있는 결정을 한다는 것을 기대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년 1월 미국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선거 과정 내내 관세 전쟁과 통상정책 변화를 예고했다. 한국 기업의 수출 전략과 산업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변수다.
각국 정부와 기업이 한 몸이 되어 벌이는 통상전쟁이 본격화되는 게 2025년이다. 정부와 여야, 기업이 하나로 뭉쳐 대응해도 쉽지 않은 상황을 한국은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맞게 되는 셈이다. 반도체 등 각종 산업지원 법안 및 산업정책들도 '올스톱' 국면에 놓였다. 내년 예산안과 세법개정안도 계류 중이다.다음 시나리오는 탄핵이 불발돼 윤 대통령이 정권을 이어가는 상황이다. 이번 불법 논란으로 가득 찬 비상계엄 사태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추락했다. ‘식물 정권’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 제대로 된 협의나 외교적 대응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재 진행되는 탄핵안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5일 0시 1분에 국회 본회의를 열어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보고했다. 표결을 위한 본회의는 6~7일 사이에 열린다. 국회법 제130조에 따르면 탄핵소추안은 국회 본회의 보고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 표결해야 한다. 탄핵소추 의결에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전체 의석 300명 가운데 200명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국민의힘이 108석을 차지하고 있어 여당에서 8명 이상이 탄핵에 찬성해야 의결된다. 하지만 탄핵 추진과 관련해서 국민의힘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당의 혼란도 불가피하다. 탄핵에 찬성하는 8명은 여권 지지자들에게 ‘배신자’ 낙인이 찍힐 수 있다. 야 6당 전 의원이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자 홍준표 대구시장은 “배신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며 “두 번 다시 박근혜 정권처럼 헌정이 중단되는 탄핵사태가 재발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정치 원로들 역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계엄령에 정면으로 대립한 것과 달리 탄핵에는 입장이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치적 목소리는 파묻히고
국민 혼란도 가중됐다. 한국 경제에 1%대 저성장 경고등이 켜졌고 내수침체와 수출 악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나온 계엄령에 민심은 악화했다.
외교적 위상에도 금이 갔다. 미국 정부는 계엄령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변인은 계엄 해제 후 “민주주의는 한·미 동맹의 근간”이라며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이 우려스러운(concerning) 계엄령 선포에 관해 방향을 바꿔 계엄을 해제하는 한국 국회의 표결을 존중한 것에 대해 안도한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계엄 선포에 대해 ‘우려스러운’이라는 수식어를 쓰고 민주주의가 한·미 동맹의 근간이라고 밝힌 것은 이번 계엄령 선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우회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심한 오판"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은 과거 계엄법에 대해 깊고 부정적인 경험이 있다" 말했다.
한국과 미국이 12월 4일과 5일 워싱턴DC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제4차 한·미 핵협의그룹(NCG) 회의는 연기됐다. 윤 대통령이 동맹국인 미국에도 사전 통보 없이 계엄을 선포하면서 한·미 동맹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이날 자국민과 비자 신청자 등 대상의 “일상적 영사업무 일정을 모두 취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퍼스트 버디'(대통령의 단짝)로 불리는 데이나 화이트 UFC 회장은 비상계엄 여파로 한국 방문을 취소했다. 화이트 회장은 정찬성이 주최하는 경기를 보러 방한할 계획이었다.화이트 회장의 취소 소식은 UFC 팬뿐만 아니라 한국 기업의 대관 관계자, 외교 관계자 입장에서도 아쉬울만하다. 트럼프 당선인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네트워크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평소 UFC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진 트럼프 당선인과 화이트 회장은 20년지기로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온 사이다.
대통령실을 둘러싼 외교·대외활동 계획은 줄줄이 취소됐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내년 1월 방한도 무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 총리는 4일 총리 관저에서 한국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한 취재진 질문에 “다른 나라 내정에 대해 이것저것 말씀드릴 입장은 아니다”라면서도 “어젯밤 계엄령이 내려진 이후 특별하고 중대한 관심을 갖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시바 총리는 특히 내년 1월 방한 조율 보도와 관련해서는 “한국 방문은 아직 무엇도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다”고 말해 추진 중이던 한국 방문을 무기 연기할 뜻을 내비쳤다.
정상회담을 위해 한국에 체류 중이었던 사디르 자파로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은 남의 나라 계엄령을 직관했다. 11년 만에 방한한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직후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외교 결례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의 방한도 무기한 연기됐다. 애초 윤 대통령은 5∼7일 한국을 공식 방문하는 크리스테르손 총리와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었다. 그 계기로 크리스테르손 총리는 5일 오후 양국 간 상호 협력을 주제로 기자간담회를 열 예정이었지만 이 역시 무산됐다. 야당과 외신에서 북한의 무력 도발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지만 북한 전문가들은 가능성이 낮다고 선을 그었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군합동참모본부 의장이 비상계엄 해제 후 군 주요 지휘관들에게 북한이 오판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태세를 유지하라고 한 것은 북한의 움직임에 즉각 대응하라고 한 것”이라며 “북한이 무력도발할 경우 국경을 침략하는 것이므로 미국과 중국이 주시하는 상황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모험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 전 장관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북한국장, 해외정보국장, 심리전국장을 거친 ‘북한 전문가’이자 김대중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치 원로다.
그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강 전 장관은 “비상계엄령 해제가 헌법에 입각해 빠르게 추진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했다”며 “하지만 문제는 이번 사건으로 국제적인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데 있고 이걸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