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모(37) 씨는 요즘 출퇴근 때마다 신문을 읽고 경제 전문 유튜브 채널을 구독한다. 유명 부자들의 SNS 계정도 팔로우했다. 미국 주식과 금 상장지수펀드(ETF)에 조금씩 투자를 시작한 그는 “주식 외에도 다양한 투자 상품을 알아보기 위해 유료 모임도 가입했다”며 “자녀에게도 일찍부터 재테크의 중요성을 일깨워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내 월급은 그대로인데 주식, 비트코인, 집값이 치솟으면서 재테크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하지만 투자는 어렵다. 까딱하다간 힘들게 벌고 모은 돈을 날릴 수도 있다.
이럴 때 힌트를 줄 수 있는 게 부자들의 투자다. 그들의 투자 범위는 넓다. 주식이나 부동산, 채권 외에도 사모펀드, 원자재, 원유, 금, 선박, 항공기, 미술품, 포도주, 벤처기업, 스포츠 구단까지 원리적으로 모든 것이 투자 대상이다. 프랑스의 글로벌 컨설팅업체 캡제미나이는 매년 세계 부자 보고서를 발표한다. 50여 개국에 근무하는 34만 명이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글로벌 자산시장의 주요 투자 트렌드와 고액자산가(HNWI)들의 투자 행태를 분석한 보고서다.
‘2024년 세계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주식을 팔아치우고 대체 자산을 담은 세계 부자들이 많았다. 한국에선 부동산 투자의 중요도가 여전히 높았지만 금융자산을 늘리는 부자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보였다.
주식 줄이고 채권·대체 자산 늘리고
세계 부자들은 현금을 축소하고 투자를 늘렸다. 다만 주식 비중은 2022년 이후 2년 연속 줄이고 있다. 순자산 100억 달러 이상인 부자들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 비중이 2023년 1월 34%에서 2024년 1월 25%로 9%포인트 축소됐다. 적극적으로 투자했다는 얘기다.
같은 기간 채권 등 고정 수익 자산 비중은 15%에서 20%로 5%포인트 확대됐다. 부동산 비중은 19%로 4%포인트 늘었고 사모펀드나 헤지펀드 등 대체 자산 비중도 15%로 2%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주식 투자 비중은 21%로 2%포인트 감소했다. 캡제미나이는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과 금리 상승 등 요인으로 안전한 자산 배분을 선호한 부자들이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을 늘렸다가 2023년 다시 평균으로 되돌아왔다”고 분석했다.
이어 “부자 3명 중 2명은 사모펀드에 더 많이 투자할 계획이라고 답했고 10명 중 7명 이상이 디지털 자산 투자를 유지하거나 늘렸다”고 부연했다.
실제 블랙스톤, KKR, 아폴로 등 미국 주요 사모펀드 수장들이 2024년 560억 달러 넘게 벌어들인 것으로 조사됐다(파이낸셜타임스). 이들 사모펀드가 보유한 자산 가치가 급등한 데다 미국 주요 주가 지수에 포함되는 등 여러 호재가 겹쳤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1월 20일 미 47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면 이들의 자산은 더 커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대적인 규제완화로 사모펀드의 기업 인수합병(M&A)이 탄력을 받고 법인세율도 낮아질 것으로 점쳐지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부자들이 주목하고 투자하는 주요 스타트업 분야로 인공지능(AI) 및 머신러닝, 핀테크, 헬스테크, 클린테크, 사이버보안, 우주기술, 교육기술, 블록체인 및 가상화폐를 꼽았다.
한국 부자, 금융자산 늘렸다
한국 부자들이 금융자산을 늘렸다. KB금융그룹의 ‘2024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부자들(금융자산 10억원 이상 보유)의 총 금융자산은 2826조원으로 1년 새 79조원 증가했다. 자산 비율로 보면 부동산자산과 금융자산이 각각 55.4%와 38.9%를 차지했다. 부동산 비중은 전년 대비 0.8%포인트 감소한 반면 금융자산 비중은 1.0%포인트 상승했다. 부동산자산 비중의 감소에 대해 보고서는 “금리 상승에 따른 개인이 소유한 부동산 가격 하락의 영향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국 부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부동산을 향했다. 투자 관심도 조사에서 1위(40%)를 기록했다. 이어 실물(금·보석·예술품) 투자(34.0%), 국내 금융 투자(30.3%)가 뒤를 이었다.단기 고수익 투자처로는 주식(35.5%)과 금·보석(33.5%)이, 중장기 투자처로는 거주용 주택(35.8%)과 주식(35.5%)이 주요 선택지로 조사됐다.
다만 한국 부자 중 부동산자산 비중이 가장 높은 총자산 100억원 이상의 부자는 거주용 외 주택(44.3%)을 단기 유망 투자처 1순위로 꼽았다.국내주식과 해외주식 중에는 국내주식에 대한 투자 의향(52.3%)이 해외주식(34.8%)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한국 부자가 국내주식과 해외주식에 기대하는 연간 수익률은 각각 평균 16.9%, 평균 16.0%로 펀드(평균 14.5%)나 채권(평균 12.8%) 대비 높았다.
부자들 사이에선 채권 투자도 인기였다(하나금융경영연구소 2024 하나은행 웰스리포트). 금융자산이 클수록 채권 보유율도 높았다. 금융자산 30억원 이상부터는 채권 보유율이 50% 이상으로 크게 증가했다. 세금 부담이 큰 부자들에게 저쿠폰 채권(저금리 시기에 낮은 표면금리로 발행된 채권)의 인기가 크게 치솟았다. 발행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채권을 매입해 만기 시 상대적으로 높은 매매차익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절세효과까지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채권의 이자수익에는 소득세가 붙지만 매매차익은 비과세이며, 종합소득세 과세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2022년과 비교해 2023년 부자 중 외화 자산 보유자의 비중이 64%에서 67%로 소폭 증가했다. 100억원 이상 부자 10명 중 9명이 외화자산을 보유하거나 보유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외화 자산 규모는 약 3억 7000만원으로 나타났는데, 총 금융자산 중 외화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10%를 상회했다. 선호하는 외화 자산 유형은 외화예금, 외화현금, 해외주식 순이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증가 폭이 적다고 여길 수 있으나 이미 부자의 3분의2가 외화자산을 보유하고, 보유 경험자까지 더하면 80%에 육박할 만큼 외화자산은 부자의 금융자산 포트폴리오에서 필수적으로 자리잡은 자산 유형"이라고 설명했다.
돋보기
글로벌 거물은 뭘 담았나
미국 주식을 줄이고 현금을 보유하는 ‘찐부자’들이 늘고 있다. 일반 대중이 너도나도 미국 주식을 사들인 2024년 ‘투자의 달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주식을 팔고 현금을 모으면서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버핏이 이끄는 벅셔해서웨이는 지난해 9월 말 기준 3252억 달러의 현금을 보유 중이다.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는 나이키나 코카콜라의 시가총액보다도 크다.
주식 대신 채권을 매입하고 있다는 점도 달라진 대목이다. 채권 투자액은 3040억 달러로 주식 투자액 2716억 달러를 넘어섰다. 벅셔해서웨이의 채권 투자는 과거 닷컴버블(인터넷 분야의 성장으로 주식시장이 급속한 상승세를 탄 1995년부터 거품이 붕괴된 2001년까지의 경제 현상) 사태 이후 22년 만이다. 시장에선 버핏의 포트폴리오 변화를 두고 그가 미국 주식을 과대평가돼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월가 ‘헤지펀드 거물’로 불리는 댄 나일스 사토리펀드 설립자도 올해 가장 선호하는 투자처로 현금을 꼽았다. 그는 “가장 마지막으로 현금을 선택했던 시기는 2022년이었고 당시 시장은 19% 이상 급락했다”며 “올해는 어떻게 될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봤을 때 연초에 현금을 보유한다면 머니마켓펀드(MMF)에서 4%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닷컴버블을 정확히 예측한 하워드 막스 오크트리캐피털 회장은 미국 증시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에 우려를 표하며 단기적으로 큰 폭의 하락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막스 회장은 “S&P500지수의 주가수익비율(PER)이 약 22배에 달한다”며 “이는 역사적 평균치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2024년 S&P500지수는 약 23%, 나스닥지수는 약 29%, 다우지수는 약 13%로 연간 수익률을 최종 확정했다. S&P500지수는 57번 역대 최고치로 하루 거래를 마감했다. 다우지수는 47회, 나스닥지수는 38회였다.반면 월가의 ‘채권왕’으로 꼽히는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2024년 10월 뉴욕에서 열린 금융 콘퍼런스에서 “나는 미국 국채를 공매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드러켄밀러는 포트폴리오 중 15~20%를 미국 국채 하락에 베팅하는 공매도 포지션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드러켄밀러가 채권을 어떻게 공매도하고 있는지 만기는 어떤지는 불분명하다. 시장에선 드러켄밀러의 결정을 두고 그가 향후 인플레이션 지속 안정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으며 미국 재정이 악화될 것으로 판단했다는 해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