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B사는 최근 응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A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연간 수십억원의 영업 적자가 이어지고 있지만, 코스닥 상장사를 인수해 신규 사업에 나섰다. B사가 A사 지분을 인수한다는 소식에 B사 주가는 급등했다. 주식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로봇과 인공지능(AI) 사업이 언급된 효과였다.
주가가 오르자 앞서 회사가 발행한 전환사채(CB)에 투자한 채권자들이 잇따라 전환청구권을 행사했다. 주가는 급등락을 반복했다. 유망 사업 진출 소식에 더해 주가가 롤러코스터를 타자 개인 투자자들의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투자자들 사이에서 곡소리가 나왔다. 지난해 말까지 3000원을 넘었던 주가가 현재는 1800원 수준으로 반토막 났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작전이 실행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주식시장 투기판 변질시키는 코스닥 ‘작전’
정책 당국이 주식시장 밸류업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시장을 투기판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막는 ‘정화 작업’도 강도 높게 진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작전’에 동원되는 좀비 기업을 선별하고 이를 막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는 코스닥 시장이 계속 2부 시장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코스닥 시장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작전은 상장사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고 투기적 투자를 유인한다.
회사가 발행한 주식을 투자자들이 쉽게 거래하도록 시장 문을 열어주는 이유는 기업의 자금 조달을 돕고, 선의의 투자자들에게 투자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작전은 이런 선순환을 망가뜨린다.
소위 작전이라고 불리는 불공정거래는 자본시장법에 따라 처벌된다. 한국거래소는 상장사가 작전에 동원되는 경우 주가 변동이 심하고, 소수 계좌에서 거래가 집중되거나 풍문이 다수 발생하는 등의 전형을 보인다며 이런 행태가 포착되면 투자주의종목으로 지정해 투자자들에게 알린다. 불공정거래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면 금융감독원에 통보돼 수사를 받는 검사 체계도 갖춰져 있다.
하지만 현행 시장감시 체계가 모든 불공정거래를 감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시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B사의 최근 행적은 이런 작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거꾸로 얘기하면 이런 기업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면 코스닥 시장의 밸류업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① 1년이 멀다고 사업 바꾸고 M&A
개별 상장사가 작전에 동원되고 있다는 조짐을 비교적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낌새는 잦은 사명 혹은 사업 변경이나 인수합병(M&A)이다. 작전을 주도하는 세력은 많은 투자자가 유망 사업에 쉽게 현혹된다는 점을 악용한다.
B사의 주요 사업은 거의 해마다 바뀌었다. 2020년까지 회사의 주요 사업은 게임 콘텐츠 제작이었다. 그런데 2021년 소규모 건축자재 업체를 인수하면서 건설업체로 변신했다. 그리고 2023년 다시 로봇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했다. 서비스용 로봇을 만드는 캐나다 업체 지분을 인수한 것이다.
미래 신사업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로봇 분야에 진출했다고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B사는 현금 80억원 가까이 들여 이 캐나다 회사 지분 45%를 인수했는데, 해당 회사의 자산 규모는 32억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로봇과 AI 기술을 접목해 사업 간 시너지를 확대하겠다면서 코스닥 상장사 A사 최대주주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B사가 진출한 신사업은 당시 주식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테마들이었다.
상당한 기술력은 물론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분야지만, B사는 솜씨 좋게 그때그때 투자자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해당 업체의 사업보고서를 보면 생산 설비와 연구개발활동 항목에 ‘해당 사항 없다’는 문구만 적혀있다.
새로 시작한다는 사업을 추진할 능력이 있는지, 인수한 회사는 경쟁력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발표가 나올 때마다 주가는 요동쳤다.
② 투자 조합 상대로 채권 발행…잇단 자금 조달
그러는 사이 회사는 전환사채를 발행하고 유상증자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2021년에만 3차례 전환사채를 발행했고, 2023년 추가로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원재료를 구매하거나 임금을 지급하는 등 운영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기존 사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다 보니 이익을 내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해당 회사 재무제표를 살펴본 증권 관계자는 “정상적인 사업에서 이익을 내지 못하니 채권이나 주식을 발행해 모은 자금으로 회사를 겨우겨우 운영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사채는 시장에 유통되면 주가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한다. 채권자는 주가가 오를 때 청구권을 행사해 이익을 얻는데, 이렇게 시장에 물량이 나오면 기존 주식 투자자들은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
③ 대주주는 약탈적 면모의 기업 사냥꾼
대주주와 임원 명단을 확인하면 해당 기업이 정상 기업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다. B사 대주주와 임원 대부분도 코스닥시장에 이미 오래전부터 이름을 알린 소위 ‘꾼’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이들은 자칭 M&A 전문가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시장에서 유명한 ‘기업 사냥꾼’이다. 이들 이름은 B사 지분 관계가 있거나 있었던 기업, 혹은 과거 작전주로 의심되는 코스닥 기업의 주주나 임원 명단에서도 확인된다.
문제는 대주주와 채권자가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B사가 찍어낸 전환사채 채권자는 투자조합을 결성하는 방식으로 정체를 숨기고 회사에 자금을 댔다. 이들은 몇 년 후 전환청구권 등을 행사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한 업계 관계자는 “편법을 활용해 부당 이득을 챙기는 기업 사냥꾼들의 작전을 막으려면 여기에 동원되는 ‘좀비 기업’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며 “작전에 악용되는 껍데기 기업을 솎아내는 질적 평가 방안을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당국은 상장폐지 요건을 강화하면서 다소의 시장 정화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행 코스닥 시장 상장폐지 요건은 시가총액 40억, 매출액 30억원이다.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는 21일, 이를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강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2028년부터는 시가총액 300억원 미만, 2029년부터는 매출액 100억원 미만 상장사는 시장에서 퇴출된다.
거래소 관계자는 “상장폐지 정량적 요건이 강화되면 소규모 상장사를 이용한 불공정거래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