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한국 대중문화 시장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민주화가 이뤄지고 소득 수준이 올라가며 국민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 사회·경제적 토양이 형성되자 곳곳에서 싹이 트기 시작했다. 드라마 부문에선 ‘여명의 눈동자’부터 ‘질투’, ‘사랑을 그대 품안에’, ‘모래시계’에 이르기까지 오늘날까지도 자주 회자되고 있는 명작들이 줄줄이 탄생했다. 영화 부문에선 ‘장군의 아들’, ‘서편제’가 흥행하는가 하면, 보다 젊고 감각적인 연출의 ‘비트’와 같은 작품도 나오기 시작했다. 음악 시장에선 더 큰 변화가 나타났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스타일 자체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의 작품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까지 담겨 젊은 세대의 폭발적인 반응도 이어졌다.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 시장에선 미국, 일본 등 해외의 작품과 아티스트의 영향력이 훨씬 컸다. 해외 작품에 대한 표절 논란도 자주 일었다. 대중문화 산업의 체계도 잡혀 있지 않았다. 해외에 진출하는 것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런데 1995년 두 기업이 나타나며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CJ ENM과 SM엔터테인먼트다. 그해 잇달아 설립된 두 업체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기반으로 다양한 작품과 아티스트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크게 터질 준비가 된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 불쏘시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게다가 이 기업들은 해외에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며 보다 큰 확장을 시도했다.
그리고 올해 CJ ENM과 SM엔터테인먼트가 나란히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두 기업은 오랜 시간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성장을 이끌어 왔으며 오늘날 K컬처의 부흥기를 만들어낸 주역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업들이 걸어온 길이 곧 한류가 걸어온 길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질문을 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K컬처 30년은 어떤 모습일까? 진화를 거듭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만 할까?
“매주, 매일 한국 문화를 즐기도록”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선 우선 두 기업의 주요 성과를 살펴봐야 한다. CJ ENM은 1995년 미국 할리우드의 드림웍스에 3억 달러(당시 환율 기준 2300억원)를 투자하며 문화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세계인이 매년 2~3편의 한국영화를 보고 매월 1~2번 한국 음식을 먹고 매주 1~2편의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매일 1~2곡의 한국 음악을 들으며 일상 생활 속에서 한국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비주류인 한국 문화가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에 침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시절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오늘날 고스란히 현실이 됐다.
CJ ENM은 영화 사업부터 시작했다. 열악한 제작 환경을 정비하고 제작, 배급, 마케팅을 연결해 하나의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덕분에 ‘공동경비구역 JSA’, ‘설국열차’, ‘기생충’ 등 흥행작들이 잇달아 탄생했다. 2020년엔 ‘기생충’으로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긋기도 했다. 드라마 시장에선 방송 채널 tvN,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을 통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도깨비’, ‘사랑의 불시착’, ‘나의 아저씨’, ‘눈물의 여왕’, ‘선재 업고 튀어’ 등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K콘텐츠 흥행작도 나왔다.
CJ ENM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시간와 비용을 투자해 글로벌 진출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사업 초기부터 미국, 유럽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꾸준히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그 결과 이젠 현지에서 먼저 러브콜을 받는 기업이 됐다.개별 작품을 수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K컬처 자체를 글로벌 시장에 이식하기 위한 노력도 지속하고 있다. K팝 시상식 ‘MAMA AWARDS(마마 어워즈)’, K팝부터 화장품, 패션, 음식 등 다양한 한국 문화를 알리는 한류 문화 축제 ‘KCON(케이콘)’이 대표적이다. 전 세계 팬들이 하나의 거대한 축제를 통해 K컬처를 통째로 접하고 즐긴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국내 4대 기획사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된 SM엔터테인먼트는 오늘날 K팝 산업의 틀을 만들고 확립했다. 그 바탕엔 체계적인 아티스트 발굴과 육성 시스템이 있다. 우선 오디션을 통해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원석들을 발탁했다. 그리고 장기간 체계화된 트레이닝을 받게 한 다음, 데뷔조를 짜서 시장에 선보였다. 이를 통해 H.O.T., S.E.S, 보아, 플라이 투더 스카이, 동방신기,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샤이니, 엑소, NCT, 에스파 등 K팝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수많은 아티스들이 배출됐다.
다양한 혁신적 시도도 이어갔다. SM엔터테인먼트는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첫 K팝 기획사이다. K팝 기획사 중 유튜브 공식 채널 개설을 처음 시도한 곳이기도 하다. 국내외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집단으로 곡 작업을 진행하는 ‘송 캠프’ 시스템도 SM엔터테인먼트가 구축했다. 이 같은 시도와 확장은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한 기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8년 H.O.T.는 한국 가수 최초로 중국에서 앨범을 정식 발매했으며 보아는 일본 시장을 공략해 큰 성과를 냈다.
SM엔터테인먼트의 과감한 도전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버추얼 아이돌 ‘나이비스’를 데뷔시켰다. 뮤직비디오도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 큰 화제가 됐다.
어려운 환경에도 새로운 K컬처 30년을 위해
K컬처의 성장 비결은 결국 두 기업이 걸어온 30년의 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급변하는 국내외 시장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기업들 역시 두 기업을 보며 때론 닮아가기도 하고 때론 차별화 경쟁을 하기도 하면서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규모를 함께 키워왔다.그러나 앞으로의 30년을 대비하기 위해선 또 다른 차원의 전략과 준비가 필요해 보인다. 성장을 이어가던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 최근 여러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기업의 공세가 강화되고 있으며 한국영화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드라마 제작비는 치솟고 있으며 K팝 업계에선 분쟁과 갈등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CJ ENM과 SM엔터테인먼트 역시 풀기 어려운 과제들을 안고 있다. CJ ENM은 지난해 티빙의 선전 등에 힘입어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여전히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티빙은 토종 OTT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드라마 부문에선 대작 ‘별들에게 물어봐’, 영화 부문에선 ‘하얼빈’이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 분위기 전환이 절실한 상황이다. SM엔터테인먼트는 2023년 카카오에 인수된 이후 사업 재정비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러 기획사를 통해 K팝 아이돌 그룹이 대거 양산되고 있는 만큼 더욱 차별화된 음악과 아티스트를 배출해야 한다.나아가 두 기업의 뒤를 이어 새롭게 활약할 K콘텐츠 기업, K팝 기획사의 탄생이 이뤄져야 한다. 과거에 비해 시장에 많은 업체들이 생겨나긴 했다. 하지만 과연 질적으로도 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봐야 한다.
지난 1월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엑스오 키티’ 시즌2는 시즌1에 이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비슷한 시기 공개된 ‘오징어 게임’ 시즌2보다 높은 순위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 작품은 미국 드라마에 해당하지만 서울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국의 명소뿐 아니라 K팝, 음식, 역사 등이 골고루 다뤄진다.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에 시즌3까지 확정됐다. 앞으로의 K컬처 30년에 관해 무작정 낙관만 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강렬한 희망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CJ ENM과 SM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더욱 많은 K컬처 기업들의 도전과 활약이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