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일본한테 지지 마래이.”
1994년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삼성전자 황창규 기술개발담당 이사에게 말했다. 세계 최초로 256메가D램 반도체를 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개발 책임자로서 직원들과 함께 청와대에 초대받아 조찬을 가졌다. 식사를 마치고 악수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양복 겉주머니에 꽂아둔 만년필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대통령이 경호 인력을 뒤로 물린 채 손수 만년필을 주워 가슴에 꽂아주며 한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황창규(70) 전 삼성전자 사장은 20년간 삼성전자에 재직하며 숱한 세계 최초 반도체 기술과 제품 개발을 담당했다. 삼성 퇴임 이후 국가 CTO(최고기술책임자)를 맡아 4차산업혁명과 AI 시대를 대비하는 역할을 했고, 이후 통신업체 KT의 수장(首長)으로 세계 최초 5G 시대를 여는 초석을 닦았다.
그에겐 한국 반도체의 역사에서 전기(轉機)를 이룬 제품과 기술들이 현대사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지난 13일 만난 그는 금색으로 반짝이는 12인치 웨이퍼 한 장과 29년 전 개발한 작은 반도체칩을 꺼내 보였다. 현재 우리 수출의 19.3%(2022년 기준), 제조업 부가가치의 18.5%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의 현장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256메가D램… ’반도체 코리아’의 서막을 열다
“제가 삼성전자에 입사할 무렵엔 기초 기술은 물론이고 첨단기술, 공정기술 모두 도시바·NEC·히타치 등 일본 기업이 주도하고 있었고, 인텔·IBM·TI(텍사스인스트루먼트)·모토로라 등도 저 앞에 있었어요. 우리는 겨우 10위였어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실리콘밸리 인근 스탠퍼드대학에서 책임연구원 겸 인텔사 자문역으로 일하던 그가 삼성전자에 기술담당 수석부장으로 합류하던 1989년 무렵 세계 반도체 업계 상황. 반도체 분야에서 줄곧 추격자(팔로어)였던 삼성전자는 1992년 64메가D램, 2년 뒤 256메가D램을 선보이면서 메모리 반도체 부분에서 지위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당시 폭발하던 PC(퍼스널 컴퓨터) 시장에서 IBM과 휴렛패커드, 델 등 세계 유명 PC 제조사들이 부르는 게 값인 삼성 반도체를 공급받아 최첨단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우리가 256메가D램 개발 발표를 8월 29일에 했습니다. 그날이 무슨 날인지 아시죠?” 경술국치일이었다. 반도체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서겠다는 다짐, 그간의 성취에 대한 자부심을 동시에 담은 날짜였다. 2009년 삼성전자 퇴임 이후에도 그가 유독 256메가D램 칩을 간직해온 이유였다.
아이폰의 ‘두뇌’가 된 삼성전자 플래시메모리
황 전 사장은 삼성전자가 2007년 9월 세계 최초로 개발한 30나노 기술이 적용된 64기가비트 낸드플래시용 12인치 웨이퍼를 보여줬다. 제품 개발에 성공하고 기념으로 간직한 몇 장 안 되는 웨이퍼 중 한 장. D램이 PC용이라면, 디지털카메라와 휴대전화 등 모바일 기기의 저장 매체로 개발된 이 반도체로 삼성전자는 2007년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모바일 시대를 주도했다. 30나노는 머리카락 굵기 4000분의 1에 불과한 초미세 기술로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다. 이 반짝이는 둥근 원판을 앞에 두고 그는 2004년 삼성전자가 개발한 플래시 메모리가 미 애플의 모바일 기기 핵심 부품으로 결정되던 순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이폰은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죠. 애플의 최첨단 제품인 아이팟도 HDD(하드디스크드라이브)를 쓰고 있을 때입니다. 휠을 돌리던 그 아이팟은 부피가 크고, 충격에 약했죠. 추위에도 약하고, 배터리도 두 시간밖에 못 버텼어요.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 모바일 기기로는 부족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죠.”
그때 삼성전자는 막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해 디지털 음악 재생 기기인 MP3에 적용하고 있었다. 애플은 아이팟이 불티난 듯 팔리고 있는 마당에 굳이 비싼 삼성의 신제품을 선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때 삼성은 잡스 대신 수석 엔지니어였던 존 루빈스타인에게 플래시 메모리로 만든 MP3 견본을 보낸다. “아이팟보다 얇고 가벼운 이 제품이 잡스 귀에 들어갈 걸로 예상했죠.”
얼마 지나지 않은 2004년 11월, IBM과 미팅을 위해 뉴욕에 머물던 그에게 애플 본사가 있는 팰로앨토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한데 하필 이때 비행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갈 수가 없었다. 자칫 거래를 망칠 수도 있는 상황. 잡스가 직접 전화를 했다. “언제 만날 수 있냐고 묻더군요, 직감했어요, 우리가 ‘을(乙)’인데 이번엔 그쪽이 더 다급했던 거죠.” 결국 한 달 뒤 만남에서 삼성전자가 아이팟나노용 플래시메모리를 독점 공급하기로 결정이 난다. 계약은 아이폰까지 이어져 세기의 제품인 아이폰 메모리와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까지 삼성이 공급하며 모바일 시대를 열어갔다. “AP는 6년을 삼성이 아이폰에 독점 공급했습니다. 모바일 시대를 우리가 함께 열었습니다.”
잡스도 궁금했던 메모리 용량 증가의 미래… ’황의 법칙’
당시 첫 만남에서 잡스는 직접 (화이트보드에) ‘아이폰’ ‘아이패드’ ‘아이티브이’ 등 글씨를 써가며 앞으로 자신이 만들어낼 모바일 기기에 대한 비전을 들려줬다. 당시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손바닥만 한 크기의 PC(즉 스마트폰)를 만들려면 작고 강력한 메모리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는 황 전 사장이 2년 전 ‘황의 법칙’을 통해 제시했던, ‘반도체 메모리 용량이 1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메모리 신성장론)는 비전과 정확히 일치했다. 잡스 역시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황 전 사장은 “요즘도 가끔 ‘닥터 황, 황의 법칙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묻곤 하던 잡스의 목소리가 생각난다”고 했다.
황 전 사장은 지금도 자신의 논문이 게재된 20년 전 학술지를 간직하고 있다. 2002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국제반도체회로학술회의(ISSCC)에서 발표한 뒤, 이듬해 논문이 실린 국제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 학회지다. 사실 삼성전자 재직 중에도 최첨단 기술 동향을 먼저 파악하기 위해 반도체 분야를 대표하는 3대 학술지의 저널 심사위원을 오랫동안 맡았다. “경쟁사들이 특허를 등록하고 학술지에 올리는 논문을 발표 전에 미리 읽으려면 심사위원을 해야 했죠. 학계를 떠난 몸이었지만, 첨단 기술 정보를 한발 앞서 파악하는 제 비책이었죠. 하하.”
황 전 사장은 최근 대학에서 특강을 맡고 저서를 집필하는 등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그는 “결과만 갖고 자랑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고, 젊은 세대에 무엇을 전해줄지를 깊게 고민 중”이라면서 “구글 같은 딴 나라 기업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기업들이, 선배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를 ‘불씨를 남기는 일’에 비유했다.
하나만 택한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 생각하냐고 묻자, 그는 ‘위험을 감수하는(risk taking)’ 정신이라고 했다. 그는 “위험을 감당해야 성공이든 실패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산업의 역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정신”이라며 “우리가 팔로어였던 시절뿐만 아니라 리더가 된 다음에도, 그리고 개인이든 기업이든 간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선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