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한국의 100대 그룹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들 기업의 총 자산총액 규모는 2014년(63개) 2205조7800억원에서 2024년(88개) 3027조3200억원으로 10년간 약 821조5400억원(37.24%) 늘었다.
100대 그룹 총 자산총액이 지난해 한국 전체 국내총생산(GDP, 1조6652억 달러)의 두 배에 육박한다. 다만 코로나19 시기인 2020년(64개)의 경우 자산 규모가 2176조1000억원으로 5년 전인 2014년보다 약 1.34% 감소하기도 했다.
10년간 한국 기업의 자산은 크게 늘었다. 준대기업으로 분류되는 자산 5조원 이상 10조원 미만 기업집단 수는 10년간 27개에서 39개로 12개 증가했다. 대기업에 속하는 자산 10조원 이상 기업집단은 36개에서 49개로 13개 늘었다.
이 중 자산 100조원이 넘는 기업집단 수는 삼성(331조원), 현대차(180조원), SK(145조원), LG(102조원) 등 6개에서 삼성(566조원), SK(334조원), 현대차(281조원), LG(177조원), 포스코(136조원), 롯데(129조원), 한화(112조원) 등 7개로 늘었다. 포스코의 외형 성장이 돋보이는 10년이었다.
10대 그룹 중 삼성, SK, 현대차, LG, 포스코, 롯데, HD현대, GS 등 상위 8개 그룹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순위는 변동이 있었다. 삼성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SK(5→2위), LG(6→4위)의 순위가 각각 3, 2계단 상승했다.
특히 한화의 성장이 눈에 띈다. 10년 전 자산 규모 37조원→112조원으로 3배 이상 증가해 7위로 올라섰으며 자산 100조원 그룹 대열에도 합류해 재계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10년 전 30위 밖이었던 에쓰오일, 현대백화점, 미래에셋 등 3곳은 30대 그룹에 합류했다. 반면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OCI, DB는 30대 그룹에서 밀려났다. 2014년 29위였던 현대는 2016년 주력 계열사였던 현대상선 계열분리로 자산 규모가 14조원에서 2조5000억원 수준으로 쪼그라들면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서 제외돼 대기업집단에서 탈락했다.
IT, 바이오, 2차전지, 이커머스, 게임, 엔터테인먼트 등 신산업의 성장으로 신규 기업집단이 대거 편입됐다. 10년 전에는 명단에 없던 네이버, 카카오, 셀트리온, 쿠팡, 에코프로, 넷마블, 두나무, 크래프톤, 하이브 등이 100대 그룹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 산업의 변화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OCI·DB, 30대 그룹서 탈락
주요 그룹 총수의 세대교체도 이뤄졌다. 지난 10년간 4대 그룹 중에선 삼성 이건희→이재용 회장, 현대차 정몽구→정의선 회장, LG 구본무→구광모 회장, 롯데 신격호→신동빈 회장으로 바뀌었다.
이 밖에 한진 조양호→조원태 회장, 두산 박용곤→박정원 회장, LS 구태회→구자은 회장, 효성 조석래→조현준 회장, OCI 이수영→이우현 회장, 한솔 이인희→조동길 회장으로 변경됐다. 지난 10년은 산업화와 글로벌화의 주역들이 대거 무대 뒤로 퇴장한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4대 그룹의 10년간 매출 변화를 살펴보면 현대차의 성장이 눈에 띈다. 삼성은 278조원→358원으로 80조원 증가했고 SK는 156조원→200조원으로 44조원 늘었다. LG는 116조원에서 19조원 늘어난 135조원을 기록했다.
현대차는 지난 10년간 매출이 135조원(150조원→285조원)이 늘었다. 특히 정의선 회장이 회장에 취임한 2020년 매출이 185조원에서 181조원→211조원→248조원→285조원으로 코로나19 시기 공급망 위기에서도 꾸준히 성장했다.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와 생산 차질도 빚었으나 당기순이익은 2021년 3조8650억원에서 빠르게 회복하며 올해 20조원으로 2년간 5배 이상 성장했다.
삼성보다 잘나갔던 대우·현대의 추락
재계 순위는 IMF 외환위기 이후 격변의 시기를 겪었다. 삼성은 2005년부터 자산 규모 1위를 고수하고 있지만 1986년만 해도 현대, 대우에 이어 재계 3위였다. 2000년대 들어 초격차 기술력으로 반도체와 TV, 스마트폰 시장에서 확고한 기술 우위와 글로벌 존재감을 드러내며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랐다. 삼성의 자산 규모는 331조원에서 566조원으로 10년 만에 235조원 증가했다.
현대는 1987년 자산 규모 1위로 대기업집단에 지정됐다. 2000년 ‘왕자의 난’ 등을 거치면서 2세들의 분가 형태로 9개 그룹으로 쪼개진 뒤 모태인 현대그룹이 30대 그룹에서 밀려나게 됐다. 현대그룹은 정주영 창업주의 5남인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이끌고 있다. 재계 3위 현대차그룹, HD현대, 현대백화점, HDC, KCC, 현대해상화재보험 등 범현대가가 대기업집단에 자리하고 있다.
‘세계 경영’으로 글로벌 시장을 누볐던 대우는 1990년대까지 현대, 삼성, LG와 함께 4대 그룹 중 하나였다. 1967년 설립한 섬유회사 대우실업에서 출발해 공격적 인수합병으로 금융, 전자, 중공업 등으로 진출해 몸집을 불렸다.
1997년 IMF 사태 이후에도 쌍용차를 인수하는 등 확장 전략을 펼쳐 1998년에는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2위로 고속성장했다. 하지만 무리한 차입 경영과 구조조정 지연, 분식회계, 대우전자와 삼성차 빅딜 무산 등이 맞물리며 외환위기와 함께 유동성 위기를 맞은 후 해체의 길을 걷게 됐다. 대우의 해체는 한국 경제에 큰 기업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신화를 무너뜨린 충격을 안겼다.
대기업 반열 오른 카카오·네이버
2019년에는 4세대 총수가 등장한 시기다. LG, 한진, 두산은 3세 경영인의 별세로 4세 경영인인 구광모 회장, 조원태 회장, 박정원 회장으로 총수가 변경됐다. 1978년생인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1976년생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40대 총수 시대를 열었다.
카카오가 2019년 ICT 기업 최초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분류돼 명실상부한 대기업이 됐다. 카카오의 자산총액은 10조원을 넘어서며 전년(39위) 대비 7계단 상승한 32위에 올랐다. 카카오는 2016년 자산 규모 5조원을 넘으며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포함됐으나 이듬해 이 기준이 자산 10조원 이상으로 바뀌면서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분류돼 왔다.
코로나19는 재계 지형을 뒤흔들어놨다. 2019년부터 카카오, 네이버 등 ICT 기업 순위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카카오는 자산이 2019년 10조원에서 2024년 35조원으로 3.5배 늘며 순위도 32위에서 15위로 껑충 뛰었다. 같은 기간 네이버는 자산 8조원(45위)에서 22조원으로 3배 가까이 증가해 23위로 올라섰다.
2020년은 코로나19의 영향이 본격화된 시기다. 코로나 영향으로 기업 전반적으로 경영실적이 악화했다. 2020년에는 공시대상기업집단(64개) 총 매출이 1401조원으로 전년(1422조원) 대비 약 20조원 감소했다. 당기순이익은 92조원→ 48조원으로 48.1% 줄었다. 특히 SK, 삼성, GS 순으로 매출액 감소폭이 컸다.
SK와 삼성은 반도체 등 주력 업황 부진에 따른 실적 악화가 원인이었다. GS는 유가 하락에 따른 석유화학제품 매출 감소와 해외 플랜트 매출이 줄어든 영향이었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34개)의 총 당기순이익도 85조원→42조원으로 감소해 전년과 비교해 반토막 났다.
부채비율도 증가했다. 공시대상기업집단의 부채비율은 67.8%→71.7%로 전년보다 3.9%p 증가했으며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도 67.3%→70.7%로 4.0%p 늘었다.
2022년에는 현대차가 17년간 지켜온 2위 자리를 SK에 내주며 재계순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그동안 5대 그룹 순위는 요지부동이었으나 SK가 현대차를 밀어낸 데 이어 2023년에는 롯데가 13년 만에 포스코에 밀려 6위로 추락하면서 최근 빅5 구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LG그룹은 2022년 LX그룹 계열분리에도 불구하고 4위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 9위였던 HD현대가 GS를 제치고 8위로 올라섰다. 한화(7위·112조원)와 롯데(6위·129조원), 포스코(5위·136조원) 간 자산 격차가 크지 않아 5위 싸움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향후 인수합병(M&A)이나 매각 등을 통해 5~7위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
재계 순위 어떻게 매기나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하는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은 각종 규제의 대상이 된다. 올해는 삼성·SK·현대차·LG 등을 포함해 88개 그룹이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인 공시대상기업집단에 지정됐다. 자산총액 10조4000억원 이상인 상호출자제한집단은 48개다.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공정거래법에 따른 공시 의무가 생기고,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제공 등이 금지된다. 상호출자제한집단은 여기에 더해 상호출자·순환출자·채무보증 등이 금지되고 금융·보험사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된다.
대규모기업집단지정제도가 도입된 것은 1987년이다.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고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정거래법 내에 도입됐다. 도입 이후 경제 환경의 변화와 함께 부분 개정이 이뤄져왔다.
1987년 당시에는 자산 4000억원 이상을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지정해 삼성 등 32개 그룹이 처음 규제 대상에 올랐다. 1993년엔 자산총액 기준 상위 30개 그룹을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1997년 1월 한보철강이 부채 5조원을 갚지 못해 도산하면서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등 대기업 그룹들이 연쇄 부도가 나며 외환위기를 촉발했다. 재벌의 무분별한 경영 및 재벌에 대한 부실대출이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재벌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다.
외환위기에 따른 대기업집단의 연쇄도산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계열사 간 채무보증에서 기인했다는 문제의식과 기업구조조정의 중요한 장애요소로 지목되면서 이 시기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소속 계열회사 간 채무보증을 금지하는 채무보증제한제도가 나왔다.
고정된 자산총액 기준은 대기업집단 지정 기업 수를 계속적으로 증가시켜 과잉규제 논란을 일으켰다. 폭발적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2008년 도입된 자산총액 5조원 이상 기준이 14년 이상 변하지 않아 2016년 기준 자산총액 340조원을 넘긴 삼성과 당시 5조원 규모의 카카오가 모두 같은 ‘대기업집단’으로 분류돼 동일한 강도의 규제를 받게 되자 형평성 논란과 함께 지정 기준을 상향해야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공정위는 2016년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상향하고 공기업집단을 제외했다. 중견그룹이 대기업에 편입되지 않기 위해 성장을 기피하는 ‘피터팬 증후군’ 등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2017년부터는 자산총액을 기준으로 대기업집단(5조원 이상)과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10조원 이상)을 나눴다. 대기업집단 숫자는 매년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2009년 48개에서 2023년 82개, 2024년 88개로 늘었다. 경제규모가 커지는데 반해 대기업집단 편입 기준인 ‘자산총액 5조원’이 2009년 이후 15년간 바뀌지 않아서다.
규제 대상 기업이 너무 많다는 지적에 따라 올해부터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기준이 자산총액 10조원에서 명목 GDP의 0.5% 이상인 기업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기준선은 10조4000억원으로 상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