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UAE서 미국 빅테크 투자 잇달아…데이터 센터와 LLM 개발 협력에 중점
최근 중동지역에서의 미국 거대기술기업(Big Tech)들의 AI 기술 관련 대규모 투자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우선 지난 4월 마이크로소프트(MS)는 아랍에미리트(UAE)의 아부다비투자청(ADIA)이 설립한 AI 기업인 ‘G42’에 15억 달러(2조5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G42는 아랍판 대규모언어모델(LLM)인 ‘자이스(Jais)’를 최초로 개발했으며 아부다비 왕실의 핵심 인물이자 UAE 국가안보보좌관인 셰이크 타눈 빈 자예드 알나얀이 회장으로 있는 대표적인 국영기업이다.
이번 투자를 통해 MS는 G42에 AI 칩을 장착한 MS 서비스에 대한 판매 권한을 주고 G42의 일부 지분과 기술 사용 감사 권한을 갖게 된다. 대신 G42는 자사 애플리케이션에 MS의 클라우드 서비스 ‘애저’를 사용하게 된다.
또 다른 미국 빅테크 기업 아마존도 4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글로벌 전자상거래 기업인 아마존은 53억 달러(7조3000억원)를 투자해 2026년 사우디에 데이터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다. 이외에도 앤드리슨 호로위츠 등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들은 사우디 국부펀드와 함께 400억 달러(54조8000억원) 규모의 AI 스타트업 육성 펀드를 조성할 계획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견상 이러한 투자들은 일반적인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AI 관련 해외 투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번 투자가 단순히 기업 간 투자협력을 넘어 국가 간 AI 기술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전쟁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UAE나 사우디 등 중동지역이 글로벌 AI 기술을 둘러싼 미·중 패권 전쟁의 핵심 격전지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동이 이처럼 미·중 AI 격전지로 부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미·중 AI 기술 패권의 격전지 중동무엇보다 중동지역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역학관계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중동 국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국의 주 수입원인 석유자원에서 벗어나 최첨단산업과 미래 기술을 통해 경제 다각화와 자립을 추진해 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중동의 핵심 국가인 UAE나 사우디가 경제와 안보 측면에서 탈서방, 특히 미국의 의존도를 줄여 나가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2011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회귀’ 선언 이후 중동에서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존재감이 미미하던 중국과 밀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UAE는 2023년 중국과 사상 첫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한 바 있으며 에미레이트항공은 정기적으로 수십억 달러 상당의 군사 장비를 중국으로부터 구매해 오고 있다. 사우디도 그동안 달러로만 가능했던 원유 거래를 중국 위안화로 결제할 수 있게 허용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를 한층 공고히 하고 있다.
특히 AI가 핵심 국가 전략 산업으로 부상함에 따라 미국과 함께 AI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중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에 MS의 투자를 받은 UAE의 G42는 그동안 중국 공급업체로부터 전자장비를 구입하고 백신 등 의료 분야에서 중국 기업과 긴밀히 협력을 해왔으며 틱톡의 모회사인 바이트댄스 등 많은 중국 스타트업에 대한 직접 투자도 지속적으로 늘려오고 있다.
이 대목에서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중국 기업과 협력하고 있는 G42가 미국인들의 의료 정보 데이터를 중국으로 유출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 상무부는 이미 2023년 말 G42의 기본 기술 인프라인 서버와 데이터센터 장비가 중국 화웨이에 의해 제공되었다는 점을 거론하며 G42를 감시대상(Blacklist)에 올리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MS의 G42 투자는 바이든 행정부의 주도하에 최대 AI 투자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동지역에서 기술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판단하고 있다. 특히 AI 생태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G42와 MS 간 협력 투자에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중동 국가인 사우디도 상황은 비슷하다. ‘네옴시티 프로젝트’를 통해 석유 의존도를 낮추려 하고 있는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는 석유로 번 돈을 반도체 구입, 슈퍼컴퓨터 구축, 인재 유치, 풍부한 전력으로 구동되는 데이터센터 건설에 쏟아붓고 있다. 실제로 사우디의 국가 전략인 ‘비전 2030’에 제시한 전략목표 96개 중 70%가 데이터 및 AI 사용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도 UAE처럼 그동안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과 긴밀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AI 분야에서는 2022년부터 중국과 전략적 협력과 공동 연구개발을 추진해 오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9월 중국의 화웨이가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 클라우드 데이터센터를 구축한 것이다.
이외에도 사우디 AI 연구의 중추기관인 킹압둘라과학기술대(KAUST)가 홍콩중문대와 협력하여 출시한 아랍어 LLM인 에이스GPT(AceGPT)도 두 나라 간 연구협력을 통한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KAUST가 미국의 감시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KAUST에는 교수, 연구원, 학생 중 상당수가 중국 본토 군사 관련 대학 출신이 많고 무엇보다 샤힌3(Shaheen 3)이라는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들 중국 출신 연구원들이 미국에서는 얻을 수 없는 슈퍼컴퓨팅 자원을 이 대학을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과거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민감한 기술과 데이터가 중국군에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이들의 입학을 불허한 바도 있다. AI 국가주의 부상그동안 미국은 AI, 빅데이터, 양자컴퓨팅, 클라우드 컴퓨팅, 의료 분야 등 최첨단 미래 기술을 둘러싸고 중국과 치열한 기술 패권 다툼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미국 상무부가 중국 수출금지 품목에 엔비디아와 AMD의 저사양 AI 반도체까지 확대 적용했으며 5월에는 화웨이에 반도체 등을 수출하는 일부 기업의 수출 면허를 취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대국 간의 기술패권에 대해 최근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AI 국가주의(AI Nationalism)의 부활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기술국가주의는 특정 국가가 자국의 전략적인 기술 분야를 선정해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지원하는 자국 중심 기술정책을 말한다.
이미 이러한 AI 국가주의의 부활은 미국이나 중국 이외의 지역에도 쉽게 목격되고 있다. 최근 합의된 유럽연합(EU) AI 법안 제정 시 프랑스와 독일은 막판 유럽 내 다른 국가들과 합의된 내용에 대해 반기를 들어 자국 AI 기업을 위한 규제완화 정책을 관철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서의 틱톡 퇴출이슈나 일본에서의 네이버 라인의 지분 매각 이슈 등도 사실 자국 중심의 국가주의적 정책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생성형 AI 같은 유치산업이자 국가 전략상 중요한 첨단산업의 경우 독자적이고 폐쇄적인 생태계를 고집하는 자국 중심의 국가주의로는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 중심의 국가주의적 패권경쟁이 당분간 생성형 AI 산업을 지배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AI 기술이 미래 경제성장과 국가안보의 핵심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