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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은 없고 성장은 있었다. 주주에 대한 배신은 없고 주식을 싸게 살 기회는 있었다. 과정은 투명했고 전략은 구체적이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일본 ‘기업 밸류업(기업가치 제고)’의 성공 비결이다.

 

대주주와 소액주주 간 이익이 일치했고 역대급 엔저로 일본 수출기업의 이익이 높아진 와중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일본 정부가 10년 넘게 거버넌스 구조를 개혁하며 닦아놓은 ‘밸류업’ 기반은 증시가 역사적 고점을 새로 쓸 수 있던 마중물이 됐다. 

 

한국 자본시장 역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라는 해묵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쁘다. 지난 2월 공개된 증시 부양책 ‘밸류업’ 논의는 급물살을 탔고 상법, 세법 개정안에 대한 논쟁도 치열하다. 각 이해관계자마다 입장은 다르다. 하지만 이들이 동시에 교본으로 삼고 있는 ‘바이블’은 일본 증시다.

최근 10년간 국가별 총수익지수

최근 닛케이225지수는 3만8000~3만9000선으로 4만 고지에선 내려왔지만 여전히 연초 대비 18% 넘게 상승한 수준이다. 버블경제 시기를 뛰어넘는 놀라운 비상이다. 반면 코스피지수는 올해 들어 5% 남짓 오르는 데 그쳤다. 10년으로 범위를 넓히면 일본 증시의 상승률은 압도적이다. 2013년 아베노믹스로 시작한 개혁이 2014년 거버넌스 개혁, 2023년 PBR(주가순자산비율) 개혁을 거치며 증시를 끌어올린 것이다. 일본과 한국이 처한 사회구조적 환경은 비슷한 점이 많다. 저출산, 고령화로 경제 성장동력이 약화하고 있고 전성기를 달리던 기업이나 경제를 떠받치던 산업의 경쟁력이 서서히 떨어졌다. 하지만 증시의 온도는 상반됐다. 출발선도 목적도 같았던 밸류업. 일본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것은 무엇일까.

 

1. 처절한 자기반성과 해외 자금유입을 위한 개혁

“일본의 성공은 잃어버린 30년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금융인들과 정부, 사회 각 계층의 의지이자 처절한 자기반성의 산물이다.”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글로벌 투자전략팀은 일본 정부의 밸류업 노력이 10년간 이어지며 장기적으로 힘을 받아온 데 주목했다.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를 얻기 위한 기업 거버넌스 개혁은 제도 수립도 중요하지만 지속성과 실천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는 얘기다. 

 

일본의 밸류업 정책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베노믹스’가 시동을 건 때다. 아베 정권은 양적완화(마이너스 금리)와 재정지출 확대, 기업 체질을 개선하는 구조 개혁으로 경기를 회복시키겠다고 했다. 이 정책들을 아베가 쏘아올린 ‘3개의 화살’이라고 한다. 이 중 세 번째 화살은 장기 저성장과 고령화에 직면한 일본 경제가 구조적으로 성장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경쟁력 회복을 기반으로 한 기업가치 제고가 필요하다는 성장전략이었다. 여기에는 ‘금융시장의 글로벌화’가 포함됐다. 대지진으로 파괴된 경제 재건의 마중물로서 해외 자금을 유치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일본 기업가치 제고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됐다. 하나는 기업지배구조 코드다. 아베 정부는 일본 기업이 보수적인 지배구조로 인해 기업가치가 저평가돼 있고 해외 자금 유입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타파하려면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해 의사결정 시스템을 투명하고 신속하고 결단력 있게 바꿔야 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상장사에 코드 전체를 준수하도록 했고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그 이유를 공시하도록 요구했다.

 

두 번째 전략은 시장의 힘을 활용해 기업 개혁을 꾀하는 ‘스튜어드십 코드’였다. 연기금과 같이 자산을 수탁하고 운용하는 기관투자가가 적극적인 주주제안 등으로 상장기업에 대한 압박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이다. 즉 책임 있는 기관투자가의 원칙(스튜어드십 코드)을 정함으로써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한다는 방안이었다. 그 결과 과거 보수적인 시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일본은 이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행동주의 투자 시장으로 거듭났다. 블룸버그 데이터에 따르면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올해 들어 일본 기업에 100건의 투자를 했다. 이 기업의 시가총액만 모두 3180억 달러(442조원)에 달한다. 일본 기업에 대한 주주제안은 3년 연속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일본 정부의 강도 높은 기업지배구조 개혁 강화 움직임이 외국인 투자자를 끌어낸 것이다. 

 

일본 금융청(FSA)은 외부 투자자보다는 기존 경영진을 보호하는 순환출자를 끝내도록 기업들을 압박했다. 지난해 취임한 야마지 히로미 도쿄증권거래소 최고경영자(CEO)도 장부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회사들의 이름을 공개하면서 이들 기업이 적극적으로 주가를 끌어올리도록 했다.

일본 밸류업과 차이점

2. 최상위시장 20% 탈락...상장사 옥석 가리기

아베 내각이 거버넌스 개혁에 집중했다면 기시다 내각은 성장성과 수익성에 집중했다. 일본 거래소는 2023년 PBR 개혁에 나섰다. 지난해 두 차례나 상장 기업들에 직접 “주가를 올리라”고 압박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 1월과 3월 도쿄증시에 상장한 3300여 개 기업에 ‘PBR이 1배를 밑도는 상장사는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공시하고 실행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PBR 1배 미만 기업은 시가총액이 장부상 기업가치보다 낮다는 의미다. 투자자들이 기업의 성장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해 주식을 사지 않으면 PBR이 떨어진다.일본의 밸류업 목표치는 명확했다. PBR 1배 미만 기업의 주가를 끌어올리고 기업의 수익성 목표는 자기자본이익률(ROE) 8% 이상으로 잡았다.

 

이는 2022년 거래소 개편 이후 일본 기업들의 ‘만성 저성장’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일본 거래소는 2022년 4개로 분산돼 있던 시장을 ‘프라임’, ‘스탠더드’, ‘그로스’ 등 3개 시장으로 재편했다. 문제는 일본 대기업이 속한 프라임 시장의 절반이 PBR 1배 미만이었고 47%가 ROE 8% 미만이었다. 일본 거래소는 옥석가리기에 들어갔다.

 

도쿄증권거래소는 프라임시장 상장사 선별을 진행해 재편 2년 만에 상장사 20%를 내보냈다. 프라임시장 상장사 수는 지난 3월 말 기준 1650개사로 12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엄격한 상장기준을 적용한 덕분에 프라임시장에 경쟁력 없는 기업이 줄면서 기업당 가치가 높아지고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시장별 공시의무도 다르다. 지배주주가 있는 프라임시장 상장사에 대해선 과반수의 독립 사외이사를 두도록 했다. 지배주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다. 다만 특별위원회로 이를 대체할 수 있다. 일본은 프라임시장 상장사엔 해외 투자자의 의결권 행사를 위해 전자의결권행사 플랫폼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또 공시 서류 중 일부는 영어 공시를 의무적으로 제공하게 했다. 정책을 주도한 도쿄증권거래소의 힘은 막강했다. 고다이라 류시로 니혼게이자이신문 금융 전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은 거래소의 개혁 조치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일본인의 체면을 중시하는 성격과 후발주자로서 모범사례를 충실히 따라가는 문화, 거래소의 막대한 영향력 등 3가지를 꼽았다.

 

2023년 6월에는 ROE가 자본비용보다 높고 PBR 1을 초과하는 기업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는 ‘JPX 프라임 150지수’를 새롭게 만들고, 공적연금과 중앙은행 등 기관투자가로 하여금 JPX 프라임 150의 벤치마크 사용을 유도했다. 일본 상장기업들이 스스로 기업가치 제고에 나서게 한 강력한 유인책이었다.

 

3. 특정 주주의 이익은 없고 성장은 있었다

“일본의 소프트한 접근방식이 성공을 거두었던 이유는 패밀리 같은 지배주주가 거의 없고 지분율 이상의 경제적 이익을 향유하는 특정 지배주주를 대변하는 이익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코스피지수

 

영국 허미스자산운용의 조너선 파인즈 수석 포트폴리오매니저가 한국과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을 분석하며 쓴 글 중 일부다.일본과 달리 한국은 ‘패밀리’ 기업이 이른바 ‘거수기 이사회’를 앞세워 늘 소액주주보다는 대주주에게 유리한 판단을 해왔다는 것이다. 배당이나 상속 과정에 대주주에게 유리하도록 배당을 낮추거나 심지어 주식 가격을 낮추는 판단까지 했다고 봤다. 반면 일본은 지배주주와 소액주주의 이익이 일치하는 만큼 소액주주를 위한 밸류업 노력이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한국 전문가들 역시 한·일 간 자본시장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대주주’를 짚었다. 한경비즈니스가 각 증권사 리서치센터장과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 50명에게 질문한 결과 이들 중 45%가 ‘대주주’에 대한 차이가 양국 자본시장의 가장 큰 차이라고 답했다.

 

한국 기업은 오너십이 매우 강한 편이지만 일본 대기업 집단에는 오너가 없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는 한국과 비슷한 기업 집단으로서의 재벌과 명확한 소유주가 존재했지만 패전 이후 일본에 들어온 미국 군정이 재벌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일본 대기업 집단은 오너가 아닌 기업 간의 상호지분 보유로 지배구조가 형성돼 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김지평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기업 밸류업을 위한 지배구조 개선 세미나’에서 국내 대기업의 대주주는 지분율이 20~30% 수준으로 외국 기업보다 낮아 외부 세력에 의한 경영권 공격의 위험에 노출돼 있지만 방어 수단은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짚었다. 

 

차등의결권과 포이즌필 등의 수단이 없어 대주주가 설비투자나 임직원 보상에 쓰여야 하는 회사의 현금을 계열사 간 주식 상호보유나 순환출자를 통한 경영권 방어에 쓰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차등의결권이란 경영권을 보유한 대주주의 주식에 대해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포이즌필은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주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오너로 대변되는 한국 지배구조와 함께 꼽는 또 다른 문제는 재무적 저성과다. 전쟁 리스크나 지배구조 리스크 외에도 국내 여러 산업에 걸쳐 나타나는 ‘재무적 저성과’가 한국 증시와 상장사에 대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의 근본 원인이란 것이다. 

 

전은조 맥킨지앤컴퍼니 시니어파트너는 ‘자본시장 밸류업 국제세미나’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전 파트너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한국 시장에 대한 저평가는 중공업과 헬스케어를 제외한 모든 업종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된다. 그는 통계적으로 기업의 ‘투하자본수익률(ROIC)’과 ‘성장(Growth)’ 등이 저평가 현상 대부분을 설명하며 순수하게 기업의 ‘국적’이 저평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비율은 1% 미만이라고 봤다.

 

전 파트너는 “자본시장도 결국 수요와 공급이 움직이는 시장이며 기업 성과가 가치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고 재무 성과로 설명되지 않는 한국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며 “제도, 문화적 개선 여지는 있지만 기업의 실질적 성과 개선에 연결되지 않는 방안은 구호에 그칠 것”이라고 했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도 기업의 본질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이 연구원은 “기업의 밸류업 의지, 우호적 경기 환경 등 복합적인 노력으로 기업의 수익성과 성장성을 높여야 한다”며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하는데 본질 가치를 높이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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