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도 적용한 '거래의 기술'
언론 활용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정책 현실화
'MAGA'로 백인 중산층 결집
사진 한 장으로 미국 대선 판도가 뒤집혔다. 지난 7월 13일 유세장에서 총격을 당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피를 흘리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지지자들을 향해 “싸우자”고 외치는 바로 그 사진이다.
배경에 나부끼는 성조기까지 더해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것만 같은 결정적 장면이 나왔다.
이 장면으로 공화당 지지층은 무섭게 결집했고 결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직을 사퇴했다.1cm만 빗겨 맞았어도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기회를 잡았다. 문제아에서 천재 사업가, TV쇼 진행자, 정치 이단아, 막말을 일삼는 미국의 지도자, 격변을 예고하는 대통령 후보가 되기까지 트럼프의 인생에는 이처럼 결정적인 몇 가지 장면이 있었다.
1. 친구들이 만화 볼 때 부동산 경매 살폈다
‘반이민’ 정서를 적극 활용하는 트럼프는 대다수 미국인처럼 이민자의 후손이다. 1946년 미국 뉴욕주 퀸스에서 독일계 이민 2세인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와 스코틀랜드 태생의 어머니 메리 앤 맥러드 트럼프와의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트럼프는 수시로 사고를 쳤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음악 교사를 때리는 문제아였다.
자서전에 나온 그의 표현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자립하려는 생각이 있었으며 폭력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기 생각을 알리고자”했다.엄격했던 트럼프의 부모는 13살 때 그를 뉴욕군사학교에 보냈다. 중·고등학교 모두 군사학교를 졸업한 트럼프는 포덤대에 진학한 뒤 펜실베이니아대 경영학과인 와튼스쿨에 편입했다.
대학 시절 친구들이 신문의 만화나 스포츠면을 읽고 있을 때 트럼프는 연방 주택관리국(FHA)의 저당권 상실 명단을 살펴보곤 했다. 이 명단은 정부에서 융자를 받았다가 저당권을 잃은 건물의 경매 목록이었다. 여기서 트럼프는 스위프트 빌리지를 찾아냈다. 대학생 시절 아버지와 함께 건물을 사들였는데 그가 최초로 벌인 부동산 사업이 됐다.
브루클린과 퀸스 일대에서 서민용 임대주택을 짓던 트럼프의 아버지는 중견 부동산개발업자였다. 이미 금수저로 시작한 트럼프는 아버지와 달리 럭셔리한 부동산 개발을 추구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100만 달러를 시드머니로 삼았고 경제불황으로 슬럼화되던 뉴욕 부동산에서 기회를 얻었다.
28세의 트럼프는 맨해튼 한가운데인 그랜드센트럴역 인근의 코모도호텔 재개발에 나섰다.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하얏트호텔과 손잡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했다.뉴욕시로부턴 40년간 재산세 면제라는 유례없는 지원을 이끌어냈다. 1980년 재개장한 호텔은 번창했고 34세의 나이로 뉴욕 한복판에 58층짜리 호화 주상복합 빌딩인 트럼프타워를 세우면서 명성을 날렸다.
2. “일단 지르고”, “언론 이용해라”
정치에도 통한 ‘거래의 기술’
트럼프를 따라붙는 수식어 중 하나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부동산 사업으로 성공한 그가 1987년 발간한 자서전 ‘거래의 기술’은 나오자마자 32주간 뉴욕타임스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방법을 쓴 이 책의 거래 방정식은 사업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통했다.
“언론은 항상 좋은 기삿거리에 굶주려 있고 소재가 좋을수록 대서특필한다. 당신이 조금 색다르거나 용기가 뛰어나거나 무언가 대담하고 논쟁거리가 되는 일을 하면 신문은 당신의 기사를 쓰게 된다. 비판적 기사일지라도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된다.”
“악평보다는 호평이 좋지만 아무런 평판이 없는 것보다는 악평이 낫다.”
“약간의 과장은 아무런 손해도 가져오지 않는 법이다.”
트럼프가 언론에 나올 때마다 막말과 혐오를 일삼는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다. 뭐가 됐든 기억에 남고 언론이 대서특필할 만한 소스를 던져주는 데 특화된 사람이다.
트럼프가 던지는 뉴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 때문에 트럼프가 막말과 혐오 정치로 미국의 양극화를 부추겼다는 지적이 있다.2008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오바마가 무슬림일 수 있다는 등 허위 사실을 암시하면서 수년간 출생 증명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사업가다운 기질로 미국의 변화하는 시류를 읽었다. 특유의 저돌성과 예측 불가능한 이미지는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고 파격적인 정책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명제 아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진했다. 2015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내세울 만한 정치 경력이 전혀 없던 ‘이단아’였지만 16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후보로 선출됐다.
저급한 허풍 정도로 여겨지던 그의 공약들은 블루칼라 백인 노동자, 농민 등의 열광적 지지를 끌어냈고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민주당 후보를 누르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취임 초 지지율은 30%대로 역대 가장 낮았다.
하지만 그는 불가능해보였던 공약을 실제로 밀어붙였다. 450마일에 달하는 멕시코 국경 장벽을 세웠고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를 감수하면서 대규모 감세안을 통과시켰다. 사회 각계의 반발에도 반이민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사문화된 무역확장법 232조를 끄집어내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3. “You are fired” 대중에 각인한 순간
2000년대 트럼프는 사업가에서 TV스타로 떠올랐다. 2004년 자신이 지분을 가진 NBC방송의 리얼리티 TV쇼 ‘어프렌티스(견습생)’를 진행한 것이 계기였다.
트럼프 계열사 관리자를 채용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너는 해고야(You are fired)”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대중적인 스타가 됐다. 그의 쇼는 2004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넘게 이어졌다.그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각인시켰다. 이전부터 미스 USA, 미스 유니버스 등 미인대회를 주관하거나 ‘나홀로 집에2’와 프로레슬링 경기에도 출연하는 등 엔터테이너 기질을 뽐내왔다.
부동산 사업가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엔터테이너에서 정치인, 대통령이 되기까지 정책뿐만 아니라 인생을 걸어온 행보 자체가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다.
4. 사회적 합의도 동맹도 필요 없다 이익만 있을 뿐
“소위 우리의 동맹이라고 불리는 국가들이 오랫동안 우리를 이용해왔다.”
트럼프에게는 동맹도 적도 없다. 사회적 합의나 국가 간 연맹도 '돈이 안 되면' 무의미하다. 최근에는 오히려 동맹을 긴장시키는 발언을 쏟아냈다.김정은을 두고 “그는 핵무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나는 그와 잘 지냈다”며 친분을 과시했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방위비를 내지 않으면 러시아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했다. 대만에 대해서는 “반도체 산업을 뺏어갔으면 방위비를 내라”는 식이다. 트럼프의 한마디 한마디에 동맹국은 긴장하고 있다.
그는 사업가 출신답게 실리를 위해선 이념과 명분을 갈아치웠다. 정치성향도 수시로 바뀌었다. 트럼프는 1987년까지 민주당원이었다. 이후 1999년까지는 공화당원이었다.
1999~2001년에는 개혁당에 가입해 2000년 대선에 출마하려고 했지만 경선에서 탈락했다. 이후에도 민주당과 공화당을 오갔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는 민주당,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공화당, 2011년부터 2012년까지는 무소속이었다가 다시 공화당으로 돌아왔다.
5.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그러다 그가 공화당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포한 것은 2015년 6월이다. 트럼프는 정치 이력이 없었고 정치 자금을 위해 이해관계에 얽매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고 지지층의 분노를 거침없이 대변하는 정치 이단아로 통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미국 제조업을 살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부활시키겠다며 파격적인 공약을 쏟아냈다.트럼프의 공약에 결집한 지지층은 쇠락한 제조업 지대의 미국 블루칼라 노동자, 즉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이었다.
김동석 미국 한인유권자협회 대표는 한경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미국의 기틀이었던 금융 산업이 부흥하고 망하고 부활하는 과정에서 제조업 노동자들은 소외됐다”며 “트럼프는 ‘러스트벨트’에 자리 잡은 백인 중산층의 소외와 분노를 자극해 당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꺾고 당선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18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트럼프는 세 번째 출마한 대선에서 또 한번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고 외쳤다.
화려한 조명 속에 등장한 그는 긴 대선 수락 연설을 통해 ‘아메리카’ 또는 ‘아메리칸’을 합쳐 모두 52번 언급했다. 특히 “아메리칸 드림을 되찾아오겠다”고 강조하며 현장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런 그가 이번 대선 러닝메이트로 발탁한 부통령 후보는 ‘러스트트벨트의 상징’으로 불리는 JD 밴스 연방 상원의원이다. 오하이오주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밴스 의원은 이라크 파병 등 군복무를 거쳐 예일대 로스쿨을 나온 뒤 변호사, 벤처캐피털 기업인을 거쳐 연방 상원의원까지 올라간 인물이다.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쓴 ‘힐빌리의 노래’는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히트를 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밴스를 두고 “중서부의 중요한 접전 지역에서 노동계층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젊은 파트너이자 트럼프의 마가 운동의 잠재적 상속자”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