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면 소재의 첫 등산복 만들면서 회사 설립
전문 등산인 중심으로 기술력 입증…'전문가 입는 옷' 이미지 확보
중국 이어 북미 진출도 시동…해외 사업 드라이브
1970년대 초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등산 등 레저는 소수만 누리는 사치였고 등산 장비는 꿈도 못 꾸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코오롱은 1973년 국내 최초로 아웃도어 의류를 내놨다. 코오롱스포츠의 시작이었다. 이후 코오롱스포츠는 고산 원정 후원부터 캠핑 등 레저문화 보급까지 ‘최초’를 만들어왔다. 지금도 국내 패션과 레저문화를 상징하는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서 있다. 50살이 된 코오롱스포츠는 또 다른 50년을 준비하고 있다.
'왜?'에서 시작된 회사
코오롱스포츠는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의 아들인 이동찬 명예회장의 손에서 탄생했다. 등산을 즐겨 하던 이 명예회장이 산을 오를 때 우연히 갖게 된 궁금증이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코오롱스포츠 이전에는 한국에 전문 등산복이 없었다. 한국의 합성섬유 산업이 1960년대 시작됐기 때문에 ‘특정 환경에서 입어야 하는 옷’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탓이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의 일상에서 교련복을 입고 생활했다.
산을 오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문 등산용품이 있던 해외와 달리 한국에는 별도의 등산 제품이 없었다. 미군이 버린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일부에만 허용됐다. 대부분 신던 신발을 신고, 입던 옷을 입고 산에 올랐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등산객들을 관찰했고 ‘왜 아직도 교련복을 입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갖게 됐다.
등산 애호가였던 그는 등산할 때 입을 수 있는 ‘전문 옷’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수많은 산악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산악인들의 아이디어를 참고해 1973년 면 소재의 첫 번째 등산복이 세상에 나왔다. 이 모델이 한국 아웃도어 의류 역사의 시작이자 코오롱스포츠 자체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최초의 제품이다.
'정체성 확립한 1980~90년대
‘전문 등산인의 필드 테스트를 거쳐 디자인되고 만들어지다.’
코오롱스포츠가 1980년대 해외 고산 원정 지원 관련 홍보에 사용한 문구다. 코오롱스포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1970년대가 브랜드의 시작이라면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굳히는 시기였다. 코오롱스포츠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전문 스포츠 회사’로 정하고, 소비자들에게 관련 이미지를 심기 위해 노력했다.
1980년 브랜드 사상 최초로 해외 고산 원정을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코오롱스포츠는 동국대 산악회의 8156m 높이의 히말라야 마나슬루산 등반을 지원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대한민국은 마나슬루 등반에 성공한 5번째 국가로 기록됐다.
이후 코오롱스포츠는 1983년 악우회의 바인타브락 2봉 원정, 1986년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을 지원했다. 1988년에는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로체 원정대를 후원하며 이들의 정상 등정에 함께했다.지금도 산악인들의 등정 성공에 국민들은 큰 박수를 보낸다. 국가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질 만한 일이 없던 그 시절, 산악인들의 고산 등정은 삶에 지친 국민들에게 큰 힘을 주는 이벤트였다. 그 뒤를 조용히 받친 브랜드가 코오롱스포츠였다.
소득이 늘고, 등산문화가 확산되던 1985년에는 ‘레스코등산학교’(현 코오롱등산학교) 운영을 시작했다. 올바른 등산 운동, 정통 등산 이론 및 기술을 정립해 산악사고 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일반인과 산악인들에게 등산문화를 보급했다. 등산학교는 현재까지도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산악인들의 교육기관으로 인정받는다.
세계 대회의 국가대표 유니폼도 지원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유니폼을 시작으로 1983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와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985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와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1988 서울 올림픽,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등 다양한 국가대표 유니폼을 지원해왔다. 특히 코오롱스포츠(당시 코오롱스포츠 액티브)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의류 부문의 공식 후원사로 선정되면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코오롱스포츠는 이 시기를 거쳐 ‘전문가들이 입는 스포츠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코오롱스포츠는 경쟁사 노스페이스가 1997년 국내에 처음 출시되기 전까지는 독보적 1위를 유지했다.
'R&D' 투자 확대한 2000년대
국내 아웃도어 시장은 200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2002년 주 5일제의 시범도입 이후 야외활동 인구가 늘어난 영향이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아웃도어 시장 규모는 2001년 5200억원 수준에서 2005년 1조원으로 확대됐으며, 2009년 2조원대로 성장했다. 이후 시장은 1년마다 1조원 이상 성장했다. 2010년 3조원대까지 커졌으며, 2011년에는 4조원 규모의 시장이 됐다.
그 중심에는 코오롱스포츠가 있었다. 시장조사업체 브랜드스탁 ‘브랜드 가치 평가지수(BSTI)’ 조사에서 2012년 노스페이스를 제치고 1위를 기록했으며, 2014년에는 아웃도어 브랜드 최초로 패션 브랜드 전체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려움도 있었다. 같은 시기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코오롱스포츠는 1위 자리에서 밀려나게 됐다. 여기에 K2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코오롱스포츠의 입지는 더 좁아졌다.
이때 코오롱스포츠는 브랜드 차별화를 위해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를 선택했다. 설립 첫해인 1973년부터 R&D 투자를 이어왔지만 2000년대 들어 더욱 공격적으로 신기술, 신소재를 개발해왔다. 등산의류 장비 제작을 위한 기술 개발 담당 ‘코오롱산악연구소(KML, Kolon Mountain Lab)’를 설립한 것도 2000년대 초반이다. 다만 KML은 현재 운영하지 않는다.
국내 아웃도어 업계 최초로 정보기술(IT)을 접목한 신개념 아웃도어 의류를 내놓기도 했다. 산업 디자이너 아릭 레비와 협업한 ‘트랜지션’ 제품(2006년), 영국 디자인스쿨 센트럴 세인트 마틴과 공동 제작한 라이프텍 재킷(2007년), MP3 아이팟 컨트롤 센서가 부착된 등산 재킷(2007년), 블루투스 기술 기반의 아이팟 MP3·휴대폰 컨트롤 다운점퍼(2009년) 등을 연이어 선보인 것도 R&D 확대의 결과다.
코오롱스포츠 관계자는 “브랜드 장수의 원인은 지속적인 R&D”라며 “독특하고 차별화되는 무수히 많은 첨단소재를 개발하는 코오롱그룹의 원앤온리(One & Only) 경영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0년대 시작된 글로벌 진출
2010년대 코오롱스포츠의 해외 진출이 시작됐다. 2017년 중국의 최대 스포츠웨어 기업인 안타그룹과 전략적으로 합작사를 설립, 베이징, 상하이 등 주요 거점 도시의 백화점, 대형몰 등에서 194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공식적인 중국 진출은 2006년 9월 베이징에 1호점을 내면서 처음 시작됐다. 매장을 200개까지 늘리며 공을 들였지만 2010년대 들어 적자가 발생했다. 독자 운영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중화권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현지 법인과 손잡고 재진출했다.
현재까지 반응은 긍정적이다. 올해 5월 상하이에서 중국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했다. 좋지 않은 현지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코오롱스포츠 차이나의 실적은 올해 상반기에만 2000억원을 달성했다. 코오롱스포츠 관계자는 “연간 목표로 잡은 4000억원도 무리 없이 달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음 목표는 북미다. 코오롱스포츠는 향후 5년 중장기 목표로 ‘북미 진출’을 결정하고 브랜드 글로벌화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김정훈 코오롱FnC 코오롱스포츠 디지털마케팅실 상무는 “코오롱스포츠 차이나 전략처럼 미국에서도 경험이나 정체성을 우선 정의하려고 한다”며 “이후 북미 환경에 맞는 상품과 R&D 투자를 확대하고 카테고리를 선정할 계획이다. 우리의 아웃도어 헤리티지를 보여줄 수 있는 트래핑과 백패킹 분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패킹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재와 경량화”라며 “제품으로 보면 경량 텐트, 백팩 등이 있을 텐데 아직 북미에서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매하는 브랜드가 없다. 우리가 경량화된 의류부터 신발까지 확장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