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MS·AMD·소니의 리파운딩 전략
애플 10배 넘게 키워낸 팀쿡·시총 10위
MS를 3조 달러 기업으로 성장시킨 사티아 나델라·망해가던 소니 부활시킨 히라이 가즈오의 리더십
한경비즈니스는 2024년 첫 호의 주인공을 ‘리파운더(Re-founder)'로 정했다. 1세대 창업가가 쓴 경영신화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간 경영자들이다. 키워드는 빅체인지다. 리파운더는 기업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체질개선을 지휘하며 ‘제2의 전성기’를 연다. 파괴적 혁신으로 새로운 시장을 열고 선두를 달렸던 기업도 정체기를 맞는다. 성공의 경험은 시효를 다하면 실패의 싹이 되기도 한다. 2024년 새로운 리파운더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유다.
1. 팀 쿡 애플 CEO
탁월한 운영과 관리도 혁신이다
“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최상의 팀 쿡이다.”
팀 쿡 애플 CEO가 경영을 맡은 2011년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팀 쿡은 끊임없이 스티브 잡스와 비교됐다. ‘신의 경지’에 올랐던 천재의 바통을 이어받은 자의 숙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애플을 묵묵히 완성하며 회사를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으로 키웠다. 그가 맡은 후 기업가치는 10배 뛰었고 외신에서는 “잡스의 애플보다 팀 쿡의 애플이 낫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뉴욕타임스는 애플의 시작은 잡스였지만 애플을 키운 건 팀 쿡이라고 평가했다.
팀 쿡이 애플에 입사하던 1998년 이전 애플의 가장 큰 문제는 운영의 비효율성이었다. 공급망 관리 전문가였던 팀 쿡은 입사한 후 재고를 쌓지 않는 최상의 로직을 개발했다. 공장 없이 세계 1위에 오른 애플 특유의 시스템을 완성한 것도 그의 공로였다. 그는 가장 먼저 모든 생산 과정을 위탁생산으로 전환한 후 재고관리에도 마법을 부렸다.
애플의 공급업체를 100곳에서 24곳으로, 창고는 19곳에서 9곳으로 줄였다. 2개월 분이 넘던 컴퓨터 재고는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6일 분으로 줄었고, 1년이 되자 2일 분으로 줄었다.
팀 쿡의 가장 큰 업적은 애플 생태계 조성이다. 잡스의 애플은 아이폰에 의존했다. 2011년 애플의 총매출에서 아이폰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에 달했다.
팀 쿡은 아이폰의 혁신보다 아이폰을 쓸 수밖에 없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애플워치, 에어팟, 애플펜슬 등 애플의 모든 제품을 촘촘히 집약했다. 나아가 그 안에 아이클라우드, 애플페이, 애플TV+ 같은 서비스를 채워 애플 생태계를 확장했다. 아이폰과 추가 제품, 서비스가 서로 판매량을 끌어올리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는 구도가 팀 쿡이 그린 큰 그림이다.
과거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잡스는 스마트폰 크기를 키우는 것을 싫어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폰을 고집했다. 하지만 팀 쿡은 고객의 선호가 바뀌는 것에 주목했다. 잡스의 유산을 버리고, 핸드폰의 크기를 키웠다.
2012년 9월 출시한 아이폰5까지 4인치 스크린이 유지됐다. 하지만 소비자는 큰 화면을 원했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고 게임을 하는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후 팀 쿡은 잡스의 '4인치 고집'을 깼다. 2014년 9월 출시된 4.7인치 아이폰6은 2억 대 넘게 팔리며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2. 사티아 나델라 MS CEO
사업구조와 기업문화를 ‘새로고침’하다
2013년 8월 19일 IT 버블 붕괴 이후 줄곧 하락하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주가가 갑자기 9% 뛰어올랐다. 그날 주식시장에 들려온 MS의 호재 단 한 가지. 빌 게이츠에 이어 14년 동안 MS를 이끌어 왔던 CEO 스티브 발머의 사임 소식이었다.
MS가 새 CEO로 발탁한 사람은 인도 출신 개발자인 사티아 나델라였다. 나델라는 1992년부터 MS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나델라 취임 전 MS 주가는 1999년 말보다 40%가량 떨어졌다. 윈도 운영체제(OS) 라이선스 판매에 안주하고 모바일 시대를 대비하지 않았던 탓이다. 2010년 시총 1위를 애플에 내줬고, 2011년 MS의 시가총액은 세계 3위에서 10위까지 곤두박질쳤다.
기업이 성장의 한계에 봉착하자 직원들의 사기도 떨어졌다. 경쟁상대가 오랫동안 없던 MS에서는 2000년대 후반부터 관료주의가 혁신을 밀어냈고 사내정치가 팀워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원으로 입사해 MS의 성장과 내리막길을 지켜본 나델라는 회사의 문제를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았다. 나델라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나는 그냥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가 했던 것을 하는 3번째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완전한 리셋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나델라의 등판 이후 MS는 다시 시장의 승기를 잡았다. 2018년 애플을 제치고 16년 만에 세계 시총 1위 기업으로 올라섰고 2019년 4월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시총 1조 달러를 돌파했다. 현재는 시총 3조 달러를 바라보며 애플의 1위 자리를 넘보고 있다. 시장에서는 MS가 애플을 꺾고 시총 1위를 차지할 것이란 분석이 대세다.
나델라의 리파운딩 전략은 ‘새로고침’이다. 그는 사업 구조와 사내문화를 동시에 리셋했다. 나델라는 CEO가 되자마자 ‘클라우드 퍼스트’ 전략을 내걸었다. 그는 클라우드 사업으로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기존 서버 사업부인 STB 부서를 클라우드 사업 부서로 통합했다. MS에 없는 클라우드 역량은 M&A를 통해 외부에서 채웠다.
나델라 CEO는 모든 서비스가 MS의 클라우드 위에서 구현될 수 있게 서비스를 집약했고 폐쇄적인 개발자 환경은 오픈했다.
MS의 클라우드 서비스 ‘애저’가 차지하는 매출은 빠르게 늘고 있다. MS의 클라우드 사업은 올해 매 분기마다 두 자릿수 이상의 매출성장률을 기록했다.
나델라 CEO는 AI 역량도 지분 투자를 통해 빠르게 구축했다. MS는 지난 4년간 챗GPT 개발사 오픈AI에 총 130억 달러를 투자하며 지분 49%를 확보했다. 선제투자를 통해 단숨에 ‘AI 퍼스트 무버’로 올라선 것이다. MS는 오픈AI의 생성형 AI를 검색엔진과 문서 작성, 클라우드 등 회사의 모든 제품에 적용하며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클라우드-AI로 이어지는 MS의 경쟁력은 또 한번 진화했다. 2023년 11월 MS는 자체 개발한 AI 반도체를 공개했다. 자사의 클라우드와 AI 서비스의 성능과 가격을 최적화하기 위한 ‘한 방’이었다.
사업 구조뿐만 아니라 기업문화도 리셋했다. 나델라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경청은 내가 실천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공감과 협업의 리더십을 펼쳤다. 부서 이기주의와 사내 정치를 조장하고 기업문화를 망가뜨리는 성과관리 시스템부터 바꿨다. 평가 방식이 바뀌자 경쟁과 성과 중심의 문화도 협업을 통한 성장으로 달라졌다. 이는 MS의 혁신과 성장의 주요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3. 리사 수 AMD CEO
단순하지만 명확한 혁신,
약속을 지키고 기술을 끌어올린다
‘엔비디아의 대항마’로 떠오른 AMD도 한때 고사 직전의 위기가 있었다. 2000년대 중반 CPU 시장에서 점유율을 잃으면서 2012년 주가는 주당 2달러대까지 추락했다. 그해 11억8000만 달러(약 1조4000억원)의 순손실을 내는 등 실적도 크게 악화됐다. 반전 스토리는 대만계 개발자인 리사 수 CEO가 구원투수로 투입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리사 수 취임 후 회사는 영광을 되찾았다. AMD의 현재 주가는 146달러 수준으로 수 CEO 취임 당시보다 48배 뛰었다. 실적도 승승장구했다. AMD는 2017년부터 적자의 늪에서 벗어났다. 그가 취임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2017년 1억2700만 달러였던 영업이익은 2020년 13억 6900만 달러, 2021년 36억 달러를 기록했다. 2022년에는 자일링스 인수로 영업이익이 13억원 수준으로 줄었지만, 매출은 꾸준히 늘었다.
개발자 출신인 리사 수는 기본에 충실한 경영을 했다. 투자자들에게 지키지 못할 숫자는 내걸지 않았고, 회사의 미래를 결정할 때는 반도체 개발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술경쟁력이 곧 AMD의 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주와의 신뢰를 쌓기 위해 기술 로드맵도 다시 짰다. 들쭉날쭉하던 AMD의 제품 출시일을 관리하기 위해 생산주기를 다시 확립했다. 7%에 달하는 인력을 감축하며 구조조정에도 나섰다.
리사 수의 소통 방식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그는 전 직원과 만나는 첫 미팅에 단 3가지 목표만을 적은 메모를 가져갔다. 메모에는 ‘훌륭한 제품 구축, 고객 관계 강화, 모든 일의 단순화’가 적혀 있었다. 수는 연구 조직도 통합했다.
이어 개발자들을 모아놓고 게임기, 서버, PC, AI 등에서 모두 쓰일 수 있는 CPU를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가이드라인으로 한 가지만 제시했다. ‘훌륭한 제품을 만들라.’ 원팀이 된 연구개발팀이 만든 것은 가성비와 성능을 모두 챙긴 ‘라이젠 프로세서’다. 라이젠은 적자와 흑자를 오가던 AMD를 되살린 AMD 사상 최고의 CPU로 평가받는다.
AMD는 리사 수의 주도 아래 CPU 제품에만 의존하던 구조를 극복했다. 2023년에는 AI칩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리사 수는 2023년 3분기 실적발표 자리에서 “우리는 데이터센터 GPU 매출이 4분기에 약 4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이고 매년 증가하면서 2024년에는 관련 매출이 20억 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자신했다. 출시를 앞둔 AI칩 MI300A와 MI300X가 대량생산을 앞두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리사 수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과감한 숫자를 내놓는 건 이례적이었다. 리사 수의 자신감에 실적발표 다음 날 주가는 10% 가까이 급등했다.
4. 개혁에는 성역이 없다
히라이 가즈오 소니 전 회장
소니가 2022년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망한 줄 알았던 가전 기업은 콘텐츠 기업으로 완벽하게 부활했다. 이제 매출의 60%가 게임, 애니메이션, 음악 등 콘텐츠와 서비스업에서 나온다. 소니의 부활은 ‘변방의 이단아’가 이끌었다. 2012년 최악의 적자에 시달리던 회사를 떠안은 히라이 가즈오 소니 전 회장이다.
“저걸로 삼성을 이길 수 있냐.”
CEO 취임 후 마주한 건 정체성과 경쟁력을 잃고 무기력에 빠진 소니였다. TV 신상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굵고 촌스러운 베젤을 보며 그는 직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삼성과 대적할 자신이 없었다. 소니는 한때 삼성의 ‘롤모델’이었다. ‘워크맨’과 브라운관 TV로 1980~90년대 세계를 제패했다.
하지만 성공에 취해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디지털을 등한시했고 2006년에는 삼성전자에 세계 TV 시장 최강자 타이틀을 뺏겼다. 부서나 계열사 간 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전자사업부 소속 직원들은 “우리가 주류”라는 자만에 취해 있었고, 다른 계열사는 모두 비주류 취급을 받는 사내풍토가 조성돼 있었다.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소니는 침몰했고 2009년부터 2014년까지 6년 동안 5차례나 적자를 냈다.
소니는 부활이 절실했다. 디스플레이 계열사를 통해 패널 경쟁력을 확보한 삼성전자, LG전자는 이미 소니를 멀리 따돌렸고, 모바일 싸움은 시작하지도 못했다.
히라이가 침몰하는 소니호의 키를 잡자, 내부에서는 “소니를 망하게 할 셈이냐”는 비판까지 나왔다. 회사의 주류인 전자사업부 소속이 아닌 인물이 어떻게 경영을 총괄하냐는 우려였다.
6년 뒤. 소니는 당시 역대 최대 실적을 올렸다. 2020년엔 창사 이후 처음으로 순이익 1조 엔(약 12조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사고 싶어도 없어서 못 사는 플레이스테이션, 세계 최정상 뮤지션들의 소속사이자 음원사인 소니뮤직, 일본 역대 흥행기록을 모두 갈아 치운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까지. 몰락한 ‘전자왕국’은 변방에서 온 이단아가 만들어낸 혁신을 발판 삼아 부활했다.
2022년에는 매출 11조 5398억엔(111조 8207억원), 영업이익 1조 2080억엔(한화 11조 7055억원)을 올리며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한때 7조원대 적자를 냈던 기업의 완벽한 부활이다.
히라이의 리파운딩 전략은 ‘성역 없는 개혁’이었다. 그는 ‘소니의 뿌리는 전자’라고 생각하는 조직문화부터 바꿨다. 반발을 무릅쓰고 PC사업부를 매각하고 TV사업부를 재편했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소니 사옥 550매디슨도 팔았다. 이 빌딩은 소니 성공신화의 상징과 같았다.
화학사업도 정리했다. 히라이는 2012년 화학사업을 일본정책투자은행에 매각한 것을 시작으로 2014년 7월 PC사업과 간판사업이었지만 실적이 저조했던 플라스마TV 사업을 차례로 정리했다. 세계 최초로 실용화에 성공한 리튬이온배터리 사업도 2017년 무라타제작소에 매각했다.
이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새로운 사업을 키웠다. 2023년 2분기 기준 소니의 매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은 게임&네트워크서비스(33.7%) 부문이다. 영업이익은 음악 부문이 810억 엔(전체의 29.8%)으로 가장 높고 엔터테인먼트 기술&서비스(ET&S)가 610억 엔으로 뒤를 이었다. 게임과 음악, 영화 등 콘텐츠가 소니의 정체성인 것이다.
20년 전 전자제품 부문이 매출의 60%를 차지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조직문화에도 칼을 댔다.
당시 소니는 보수적이고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일본 특유의 기업문화에 찌들어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자란 히라이 회장에게도 이런 문화는 익숙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회장 직속실을 만들고, 진행 상황을 수시로 확인했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해선 ‘내가 책임진다’라는 걸 분명히 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일본과 해외를 오가며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전자가 주류인 소니에서 음악과 게임 등 출세와 거리가 먼 사업부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주류에서 비켜난 이단아로 인생을 살아온 게 내 리더십의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개혁을 끝낸 2018년 4월, 히라이는 CFO를 역임한 요시다 켄이치로에게 CEO 자리를 넘겼다. 히라이와 마찬가지로 요시다도 비 전자 부문에서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