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일본에는 마쓰시타도 없고 혼다도 없다. 한국 기업들에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3년 이 같은 말을 한다. 마쓰시타는 경영의 신으로 불린 파나소닉 회장이고 혼다는 기술의 혼다를 만든 창업자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후 삼성은 질주했고, 이건희의 예언은 불과 10년여 만에 현실이 된다.
2005년 11월 마이니치신문이 발행하는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일본 전자업계의 위기’라는 기사에서 “왜 일본에는 이건희 같은 경영자가 없는가”라고 자문할 정도였다.
이건희 회장 일화는 후계자, 리파운더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최근 기업들은 린 스타트업 방법론, 애자일 개발 등 스타트업의 경영 방식을 적용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 왔다. 하지만 기업의 키를 쥔 CEO가 부재하다면 미봉책에 그칠 뿐이다.
기업이 필요한 건 그저 그런 CEO가 아니다. ‘이제 한국에는 이건희도 없고 구본무도 없다. 한국 기업들에 또 다른 새로운 기회가 열릴 시점이다.’
경영 승계가 이어진 한국 사회는 이미 3세 경영을 넘어 4세 경영까지 왔다. 그사이 기업사냥꾼은 도처에 깔려 기업을 넘본다. 불확실한 세계 정세에 스러지는 일도, 아차 하면 사모펀드에 기업의 경영권을 뺏기는 일도 허다하다. CEO가 오너인지, 전문경영인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기술·환경 변곡점의 시대에서 기업에 필요한 것은 창업 못지않은 재창업으로 회사를 수성할 우수한 CEO다. 우리는 그를 ‘리파운더(Refounder)’라고 부른다. 2024년 리파운더의 탄생에 한국 기업의 명운이 달렸다.
1. 이건희
신경영 - 준비된 리파운더의 힘
일본에서 삼성전자 쇼크가 처음 일어난 것은 지난 2004년이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부문을 중심으로 10조원이 넘는 이익을 올린 것이 일본 열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요미우리신문은 삼성의 순이익은 소니와 마쓰시타전기를 비롯해 일본 상위 10개사의 순익을 합친 것의 두 배에 해당하는 것이라며 ‘삼성 충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외환위기가 발생한 해인 1997년 순이익이 고작 1240억원으로 결코 우량기업이라고 할 수 없었던 삼성전자의 대반전은 일본 열도에 가공할 충격이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평가는 통쾌할 정도였다. “삼성전자에 맞설 수 있는 일본 기업은 제조업체로는 도요타자동차밖에 없다. 삼성의 강력한 리더십과 신속한 결단은 일본 경영자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지금은 세계를 호령하는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1974년 12월 파산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건희 회장이 사재를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오일쇼크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반도체 사업 전망이 극히 어두웠던 시기였다. 측근들은 “미국, 일본과 같은 선발주자를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투자 과잉에다 기술자가 없습니다”라며 이 회장을 극구 만류했다.
이 회장은 사재 출연을 결심하며 반도체 사업을 고집했고, 당시 회장이었던 부친 고 이병철 회장을 설득해 반도체 사업에 도전장을 냈다. 반도체 산업이 한국인의 문화적 특성에 부합하며, 한국과 세계경제의 미래에 필수적인 산업이라 판단한 것이다. 불과 서른둘의 나이였다.
반도체 사업이 처음 갈림길에 선 것은 1987년. 당시 과제는 4메가 D램 개발이었다. 삼성의 고민은 트랜지스터의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회로를 고층으로 쌓는 스택 방식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회로를 밑으로 파는 트렌치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였다.전문가들의 의견을 두루 들은 이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스택 방식을 택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화하려고 한다. 두 기술을 단순화해보니 위로 쌓는 것이 더 쉽다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대성공이었다. 당시 세계 D램 시장 1위였던 일본 도시바는 트렌치 방식을 택함으로써 수년 후 선두자리를 삼성전자에 빼앗기게 된다.
이 회장은 1993년에는 반도체 5라인을 깔면서 두 번째 승부수를 던졌다. 세계표준은 6인치 웨이퍼였다. 삼성은 8인치를 택했다. 이 회장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따라가다가는 경제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한다. 월반(越班)하지 않으면 기술후진국에 머물게 된다”며 8인치를 택했다. 면적은 제곱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생산량을 배로 늘리는 모험이었다. 그의 모험은 성공적이었고, 이를 계기로 삼성전자는 반도체 D램 부문 황제 자리에 올랐다. 2024년이 된 오늘도 삼성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반도체다.
그는 학습된 리파운더였다. 1977년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이 “막내아들이 후계자”라고 말해 후계 구도를 공식화한 뒤부터 그는 오랜 기간 후계자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듬해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한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 바로 옆방에서 일하며 경영을 배웠다. 1987년 창업주가 타계하기 전까지 10년의 학습이었다. 그 결과는 그 유명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신경영으로 나타났다. 이 발언은 삼성을 넘어 한국 경영사를 바꾼 획기적인 전기(轉機)가 됐다
2. 최태원
M&A – 비약적 발전, 재창업의 도구
삼성과 함께 반도체 강국을 이끄는 또 하나의 기업이 있다. SK다. 2011년만 해도 SK그룹의 주력 포트폴리오는 석유화학과 통신이었다. “공기업 2개 인수해 편하게 먹고사는 기업”이라는 비아냥도 들어야 했다. 한국에서 내수기업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2011년 7월 최태원 SK 회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도체 사업은 한다”며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를 선언했다. 모두를 놀라게 한 깜짝 소식이었다. 당시 반도체 산업은 큰 불황을 지나고 있었다. D램 가격은 사상 최저치를 이어갔고 2011년 3분기 하이닉스반도체의 분기 적자는 2909억원에 달했다.
SK그룹 내부 경영진조차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를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룹의 주력 포트폴리오와 반도체 산업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비즈니스 사이클 진폭이 매우 큰 반도체 회사를 인수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었다.
산 넘어 산. 최 회장의 뚝심에도 그룹으로선 막대한 투자금을 동원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시장의 우려도 컸다. SK텔레콤이 하이닉스반도체 인수전에 뛰어든다는 소식에 2011년 초 17만원대였던 SK텔레콤 주가는 12만원대까지 떨어졌다.
인수 가능성이 점차 낮아지던 그때 유럽발 재정위기가 터졌다. 주식시장이 흔들리면서 2011년 4월 3만7000원까지 상승했던 하이닉스반도체 주가가 그해 8월 5000원대까지 떨어졌다. 반도체를 노리던 최 회장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하이닉스반도체의 최종 주당 인수 가격은 구주 2만4500원, 신주 2만3000원으로 결정됐다. 최 회장이 인수를 승인할 당시 3만원대에 육박했던 것과 비교하면 ‘싼값’에 반도체를 품에 안은 것이다.
그는 “SK그룹 회장으로서 하이닉스를 반드시 성공시켜 앞으로 그룹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매진하겠다”며 하이닉스에 전력투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 인수 직후 4조원에 달하는 설비 증설을 단행했으며 2012년부터 10년 동안 투자한 금액은 46조원에 달했다.
성공 M&A와 R&D 투자 확대는 SK하이닉스를 그룹의 핵심 성장축으로 키워내기에 충분했다. 통신·정유를 인수하며 몸집을 키운 SK가 반도체를 집어삼키며 다시 한번 비약적 성장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2022년 SK는 12년 만에 재계 3위에서 2위로 올라섰다. 최 회장의 통 큰 결단이 없었다면 불가한 일이다.
3. 정의선
가업 - 세대별 역할로 백년대계
가족기업의 30%는 2세대까지 생존하지만, 3세대로 넘어가면 그 비율이 14%로, 4세대로 넘어가면 그 생존비율은 4%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세대 간 갈등으로 경영 위기에 처하는 일도 부지기수이지만, 대체로는 후계자들이 사업에 안주하다가 환경과 기술의 변화 속에 떠밀려 최고의 자리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대를 거듭할수록 승승장구하는 기업이 있다. 2023년 전세계적인 경영난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 실적이 예상되는 현대차·기아다.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 2022년 양사 모두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 연간 사상 최대 실적을 이미 2023년 3분기 만에 돌파했다. 4분기 실적 발표가 남았지만 증권가의 예측이 맞다면, 작년보다 10조원을 더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성과를 이끈 사람은 3세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다. 정의선 회장은 2020년 아버지 정몽구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20년 만에 그룹의 키를 잡았다. 그의 경영 방향은 온전히 ‘미래 기술’에 있었다. 첨단 모빌리티 솔루션 업체로의 전환이었다.
그가 현대차의 대표이사에 오른 2019년 당시만 해도 자동차산업은 저물어가는 해에 비유됐다. 테슬라 쇼크로 완성차업계 영업이익이 쪼그라들면서 은행 등 금융권은 자동차를 ‘요주의 업종’으로 분류했다. 산업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세상은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한국은 단기적으로나 중·장기적으로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자동차산업이 이 정도로 심각하게 벽에 부딪힌 상황은 처음이다”라는 악평을 남길 정도였다.
정 회장이 미래 기술에 천착한 것은 어쩌면 현대차를 이끄는 그의 시대적 사명이었다. 완성차에서 친환경차, 자율주행차로 더 나아가 로봇, UAM(도심항공 모빌리티), 스마트시티 등과 같은 폭넓은 영역으로의 기술개발과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미래 성장을 위해 그가 쏟아부은 그룹 총투자액은 연간 20조원 규모로, 5년간 총 100조원 이상의 투자를 약속했다.
“자동차 제조업이 아닌 모빌리티 서비스 브랜드로 사업을 재편하는 과정은 큰 도전입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이미 그 일을 시작했죠.” 회장 승진 후 그가 미국 CNN 방송 광고에 등장해 한 첫 이야기는 현대차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한국 산업의 근대화를 이끈 1세대 고 정주영 창업자, 그룹 출범 10년 만에 세계 5위의 자동차그룹으로 성장시키고 글로벌 자동차산업 발전에 기여한 2세대 정몽구 회장, 미래 모빌리티 산업 생태계를 주도하는 3세대 정의선 회장까지…. 그룹의 변곡점에서 변화와 혁신으로 맞서 가족기업의 생존율을 높인 몇 안 되는 사례다.
4. 포스코
-리파운더 배출 시스템의 탄생
현대차가 오너일가의 세대별 혁신으로 백년대계를 꿈꾼다면, 기업 안에 리파운더를 배출하는 시스템을 만든 회사도 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철을 만들어 나라에 보답한다)’의 정신으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사가 된 포스코다.
포스코를 거쳐간 CEO들의 면면을 보면 리파운더를 배출하는 포스코만의 시스템을 엿볼 수 있다. ‘철강을 아는 자’에게 왕좌가 주어지는 단순한 공식이다. 이 단순한 공식이 대개의 기업에선 통하지 않는다. 해당 분야를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자가 CEO에 앉는 일이 허다해 전문성 논란이 불가피하고, 민영화된 사기업에선 특히 낙하산 논란이 따르기 일쑤다.
포스코는 지배구조에 대한 중요성이 본격화되기 전인 1990년대 말부터 ‘국내에서 가장 지배구조가 선진적’이란 평가를 받은 기업이다. 소유와 경영을 완전 분리해 전문경영진이 책임경영하고 독립적인 이사회를 통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 왔다.
이 과정을 통해 등장한 전문경영인들은 포스코의 문화와 사명은 유지하되, 그만의 강점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대응해 왔다. 창업자 박태준의 정신을 승계받아 재창업에 나선 리파운더들이다.
예컨대 2003년부터 2009년까지 포스코를 이끈 제6대 이구택 회장은 포스코를 지금의 세계적 반열에 오르게 한 주역이다.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해 포스코 공채 1기로 입사한 그는 36년 전통의 철강맨. “새로운 도약을 개시한 CEO로 기억되고 싶다”던 그는 “글로벌 500대 기업에 10개만 포함되어도 그 나라는 선진국 소리를 듣는다”는 일념하에 로컬 기업 포스코의 글로벌화를 주도했다.
그의 대대적인 투자 안에 외국인 주주들조차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지만 그는 미래를 위한 설비투자가 곧 주주가치를 높이는 일이라며 글로벌 투자 방향을 굽히지 않았다. 파이넥스 공법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중국, 인도, 베트남, 멕시코, 브라질 등 철강 원료를 보유한 해외에 생산기지와 판매망을 확충했다. 회장직에서 물러나던 날 그는 “지난 6년은 회사가 로컬 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었고 제 역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말했다. 로컬 기업 포스코를 글로벌로 이끈 리파운더의 일성이었다.
이 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가 제7대 정준양 회장이다. 포스코에서 제강부장, 생산기술부장, 광양제철소장, 생산기술부문장 등 생산기술 분야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친 그는 정통 엔지니어 출신의 CEO다. 정 회장은 철강에 중점을 둔 이전의 CEO들과 달리 “지금까진 철강 공장을 건설·운영하는 것 중심으로 사업을 펼쳐왔는데, 앞으로는 M&A 기회가 있다면 거침없이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포스코의 신경영을 알렸다. 그는 공격적인 M&A로 희소금속자원을 확보해 종합소재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최대 몸값으로 평가받은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인터내셔널)이 그의 M&A 작품이다.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그가 포스코를 떠나는 날까지 무리한 M&A를 주도해 그룹에 연쇄적 손실을 입혔다는 부정적 평가가 뒤따랐다. 별명도 ‘마이너스의 손’이었다. 하지만 전문경영인의 과감한 M&A는 포스코의 현재를 만들었다. 철강을 넘어 글로벌 종합소재기업으로의 기틀이 정 회장의 손에서 다져진 것이다.
그가 만든 기틀하에서 현 최정우 회장은 글로벌 종합소재기업의 꽃을 피었다. “철강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수익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철강의 뒤를 잇는 강력한 성장엔진을 발굴해 발전시켜야 한다. 제2의 창업을 한다는 각오로 임해달라”던 그의 주문은 포스코의 오늘을 만든 토대가 됐다.
그룹 주력 사업인 철강을 중심으로 2차전지 소재 등 신사업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면서 포스코그룹은 2023년 재계 순위 5위에 진입했다. 앞으로도 최 회장은 전구체·양극재 등 2차전지 주요 소재와 수소 등 신성장 사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향후 10년간 최소 4조4000억원을 블루수소, 니켈수산화침전물(MHP) 정제 사업 등 12개 신사업에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5. 구광모
미래 기술 선점으로 재창업
2018년 구본무 회장의 타계로 LG그룹의 경영권을 쥐게 된 구광모 회장은 시작부터 ‘젊은 총수’로 주목 받았다. 그의 나이 만 40세, LG가 4세 경영의 시작이었다.
업계에선 젊은 총수의 경영 능력을 시험대에 올렸다. 만 28세인 2006년 LG전자에 입사해 13년간 경영 수업을 받았지만,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는 경험과 경륜 부족으로 낙인찍히며 오너 리스크란 평가를 지울 수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최대 과업은 미래 먹거리를 위한 신사업 발굴. 당시 LG는 자동차 전장부품 사업과 인공지능, 로봇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나타나지 않을 때였다.
그런 LG가 M&A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기 전 LG는 M&A에 있어 가장 보수적인 기업집단이었다. 2018년 이전까지 ‘조 단위’ 투자는 전무했다.
구 회장의 지휘하에 LG는 굵직한 M&A를 단행하며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의 광폭 행보는 2020년 LG화학의 배터리사업본부를 분사하면서 빛을 발한다. LG에너지솔루션이 지금의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 1위에 등극한 배경이다. 2020년 12월엔 캐나다 자동차부품 업체인 마그나인터내셔널(이하 마그나)과 합작법인을 세우면서 전장 사업 3개 축을 완성한 전장업체로 거듭나는 데 성공한다. VS사업부는 2022년 1696억원의 영업이익으로, 첫 연간 흑자 전환을 달성했고, 2023년 3분기에는 매출 2조5035억원, 영업이익 1349억원을 냈다. 기대치가 낮았던 ‘만년 2등’ LG의 반란이자, 신수종 사업으로 성공적인 전환을 거둔 구 회장의 한 방이었다.
그는 비핵심 사업 매각도 과감히 진행했다. 2021년 4월 만년적자 스마트폰 사업과의 안녕이다. 당시 재계에선 “휴대폰 사업 종료는 LG에서 보기 어려웠던 신속하고도 과감한 결정”이란 평가가 잇따랐다. 구 회장의 판단력이 과거 LG와 다른 의사결정을 만들었다는 분석이었다.
5년 차 구 회장은 그에게 주어진 경영 물음표를 천천히 지우고 있다. 이미 숫자는 그가 창업 못지않은 재창업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취임 당시 88조1000억원이었던 LG그룹의 시가총액은 2023년 12월 26일 기준 182조5684억원으로 배 이상 뛰었다. 4세대, 보기 드문 리파운더의 발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