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제한 등 규제에 저렴한 주거 수요 맞물려
장기적 공급문제 해결위해 용도지역제 재검토 필요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된 경매지도가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화곡동 근황’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이 지도에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에서 진행 중인 경매 건이 빨간색 표시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가구는 다세대·다가구 주택을 사들인 임대인이 전세보증금 등 채무를 갚지 않아 법원 경매에 나온 일명 ‘전세사기’ 물건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해석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2월 13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맹성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발표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자료에 따르면 HUG가 전세자금보증을 했다가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대위변제하고 채권 추심이나 경매 등을 통해 회수하지 못한 금액이 4조원을 넘겼다. 이 중 서울 지역의 채권잔액이 1조5147억원으로 가장 많고 그중 강서구가 5237억원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HUG가 앞으로 강서구에서 대위변제한 채권을 회수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부동산 경매 시장이 침체에 들어선 데다 전세사기 문제가 불거지면서 화곡동 같은 저층 주거지 내 다세대주택에 대한 인식도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지옥션 집계에 따르면 지난 1월 진행된 서울 소재 다세대 경매는 총 660건으로 매각률은 18%에 그쳤다. 이주현 지지옥션 수석연구원은 “강서구에서 매각이 된 20여 건 대부분은 유찰이 반복되면서 보증금을 떼일 위기의 임차인이 매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전세사기 등을 계기로 화곡동 등 서울 내 저층 주거지에 대한 재개발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전세사기 문제는 오랫동안 해당 지역은 물론 도심 곳곳에 아파트 등 쾌적한 주택공급이 부족해지면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급등한 전세가격으로 인해 신혼부부 등 젊은 실수요자들은 대체재인 다세대에 더욱 몰렸고 임대인은 손쉽게 ‘무자본 갭투자’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좁은 도로와 소방시설 부족, 지하층 침수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저층 주거지 재개발 추진의 발목을 잡던 용도지역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나섰지만 또 다른 규제의 관문과 사업성이 과제로 남아 있다
노후 주거지, 공항과 규제 등으로 개발 안 돼
화곡동은 1960~70년대 당시 면목, 신촌, 영동(강남)과 함께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해 단독주택 용지가 대규모로 공급된 지역 중 하나다. 1980년대 이후로는 대단지 아파트가 택지개발 등을 통해 공급되며 주거 트렌드의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각종 규제로 재개발 사업이 막혀 있었다.
화곡동을 비롯한 강서구 일대는 김포공항 주변에 위치해 전체 면적의 97.3%(40.3㎢)가 고도제한 규제를 받고 있다. 공항시설법에 따라 활주로 반경 4㎞ 이내 건축물은 해발고도 57.86m 이하 높이로 지어야 한다. 현행 고도제한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채택한 국제기준에 부합해야 하므로 당장 완화하기 어려운 상황이다.화곡동 주택가의 용도지역 역시 재개발 추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토지이용계획상 서울지하철 5호선 화곡역 일대 사거리와 대로변을 제외한 화곡동 일대는 대부분 제2종일반주거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국토계획법(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시행령) 및 동법 시행령에 따라 제2종일반주거지역의 용적률 상한은 250%(서울시 조례 기준 200%)가 적용된다. 용적률은 건축 가능한 토지면적 대비 지하층 등을 제외한 건축물 전체의 면적을 뜻한다. 고도제한이 있더라도 해발기준에 따라 지대가 낮은 곳은 최대 15층까지도 공동주택 개발이 가능하다. 일부 부동산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파트 개발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사업성이 높은 수준도 아니다.
그런데 화곡동 주택가에 위치한 상당수 필지에는 ‘7층’이라는 단서가 더 붙는다. 서울시는 도시계획 조례(제28조) 5층 이하 주택이 밀집한 2종일반주거지역에 대해 건물 층수를 7층 이하로 규제하고 있다.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스카이라인이 갑작스럽게 변화하면서 도시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취지다. 일반적인 2종일반주거지역 층수 상한은 25층(공동주택 기준)이다.
이 같은 규제로 재개발 추진이 미뤄지자 단독주택들은 신축 다세대·다가구주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저렴한 집을 찾는 직장인, 학생 임차수요가 많아 빌라나 원룸 개발 사업성은 좋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기 위한 노후도 기준도 충족하기가 어려워졌다.
강서구청 관계자는 “화곡동 빌라촌은 공항 인근 고도제한과 용도지역 규제, 신규 빌라 개발 등 각종 원인이 중첩돼 그동안 재개발되기가 어려웠다”며 “최근 발생한 지역 내 전세사기 문제를 예방하고 주거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후 주거지의 정비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공사비 인상에 추가 규제완화 필요성 커져
2022년 기준 제2종일반 7층 이하 지역은 서울 전체 면적의 14.1%를 차지하고 있다. 동대문, 중랑, 마포, 양천, 동작에선 20%가 넘는다. 통상 역세권이나 대로변에 상업, 준주거지역을 중심으로 1종, 2종일반주거지역이 이면 주택가에 자리 잡는 형태가 많다. 서울연구원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시내 소형 주택지는 전체 주택 시가지의 25%를 차지하고 있다.그런데 이런 소형 주택지도 입지에 따라 다르게 진화해왔다. 마포 같이 대학가나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한 지역에선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방식으로 특색 있는 상권이 형성됐다. 도심 곳곳에 ‘○리단길’이 형성되며 지역 부동산 가치가 높아진 배경에는 오히려 아파트나 고층 빌딩 개발이 어려웠던 용도규제가 유리하게 작용한 측면이 있다. 반면 강서, 구로, 금천구 등 서울 서남부, 중랑구 등 동북부를 비롯해 저렴한 주거 수요가 집중되는 주택가는 ‘빌라촌’으로 남게 됐다는 분석이다.
서울시는 2021년 10월부터 주택공급 활성화를 위해 ‘서울특별시 지구단위계획 수립기준’을 시행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등 도시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경우 2종일반주거지역에 대한 7층 높이제한을 푸는 방안이 여기 포함된다. 2022년에는 모아타운 내 추진되는 모아주택사업에 대한 층수제한도 완화했다. 모아타운은 10만㎡ 미만 규모 소규모주택정비관리지역으로 지난해 시행된 ‘빈집 및 소규모주택정비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노후도 요건이 재개발사업(건축물 3분의 2)보다 낮은 50%가 적용된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25개 자치구 내 총 81개 모아타운 대상지를 발표했다. 이 중 중랑구가 11곳, 강서구가 10곳으로 대상지가 가장 많았다. 특히 강서구는 내년으로 예정된 ICAO의 고도제한 국제기준 개정안 이사회 통과를 기대하고 있다. 강서구에선 ▲화곡1동 1087번지 일대 ▲화곡1동 354번지 ▲화곡1동 359번지 일대 ▲화곡6동 1130-7 일대를 비롯해 총 6곳이 서울시 통합심의를 통과했다. 이 중 승인·고시를 마친 화곡1동 관리계획에는 일부 사업부지에 대한 용도지역 상향(2종일반주거지역→3종일반주거지역) 계획도 포함됐다.
최근에는 규제완화 차원을 넘어 용도지역제(zoning)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용도지역제는 정해진 토지용도에 따라 건축물 용도와 함께 건폐율·용적률·층수 등을 제한하는 제도를 뜻한다. 국내 용도지역제는 다른 선진국과 달리 경직된 기준을 적용하면서 오히려 쾌적한 주거환경을 조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최근 공사비 인상으로 인해 재개발, 재건축 현장에서 갈등이 불거지며 더 힘을 얻는 추세다. 일반적인 재개발, 재건축 사업을 추진할 때 용도지역 상향은 어려우며 지구단위계획 등 상위 도시계획에 따라 가능하더라도 공공임대 등 기부채납 부담이 커 사업성을 크게 개선하기 어렵다. ‘재건축 분담금 5억원’으로 논란이 된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 역시 2종일반주거지역을 3종으로 상향했으나 공공임대와 조합원분을 제외하면 일반분양 물량은 100가구가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국토계획법 일부 개정안’은 공간혁신구역을 지정해 기존 용도에 따른 건축 용적률, 건폐율 등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실제 적용범위가 어느 정도일지는 미지수다.
최원철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는 “몇 년 새 2배 이상 급증한 공사비로 인해 기존 규제대로 지으면 서울에서도 강남 외에 재개발, 재건축을 추진할 수 있는 조합원들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고층 주거단지를 조성하면 주변 일조권 등이 침해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서울 한복판 주택가에선 빌라들이 더 빽빽하게 들어서 실내에 햇볕도 잘 들지 않고 있다”면서 “도시 주거환경을 더 쾌적하게 하려면 현행 용도지역 규제를 대폭 완화해 아파트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편이 낫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