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고강도 쇄신을 위해 구조조정 작업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그룹 차원의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과 함께 정기 인사철이 아닌데도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 수장을 수시 인사를 통해 교체하며 전열 재정비에 나서고 있다.
SK그룹의 배터리, 바이오, 반도체 등 핵심 성장동력은 고금리와 지정학적 위기 등 경기침체 여파로 부진에 빠져 있다. 이뿐만 아니라 최태원 회장의 이혼소송 항소심 판결에서 1조원이 넘는 재산분할 결정이 나오면서 그룹 안팎으로 위기감이 팽배하다.
고강도 쇄신이 필요한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한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과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의 향후 역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믿을맨’ 최창원·최재원·유정준 전면에
최태원 회장은 지난 6월 17일 재판 현안 관련 설명회에 직접 참석해 총수로서 흔들림 없이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이번 판결이 총수 개인의 사생활 이슈를 넘어 그룹 전반의 위기로 확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최 회장이 꺼내든 위기 돌파 카드는 ‘사촌경영’이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과 사촌 동생인 최창원 의장이 지주사인 SK(주)와 SK디스커버리를 각각 책임지며 사촌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위기 때마다 친족 중심 체제를 강화하며 돌파해왔다.최태원 회장이 지난해 “빠르게, 확실히 변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며 ‘서든 데스(돌연사)’ 위험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 이후 연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부회장단이 전면 교체되는 파격 인사 속에서 최 회장은 최창원 의장을 해결사로 투입했다.
최창원 의장은 그룹 내 ‘사업 구조조정 전문가’로 꼽히며, SK그룹의 투자를 전면 재점검하고 비주력 자산과 지분 매각을 추진해 대대적 ‘군살 빼기’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은 계열사 숫자를 줄이는 방안도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의 계열사는 현재 219곳으로 국내 대기업 집단 중 가장 많다. 최태원 회장은 일부 계열사의 중복 사업 등 방만한 투자에 대해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최 의장은 최근 계열사들에 “관리 가능한 범위까지 자회사를 줄여야 한다”고 주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적자 수렁 SK온 구해라’…SK이노·E&S 합병 검토
친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에게는 정유와 배터리 동반 부진으로 사업구조 재편이 시급한 SK이노베이션을 맡겼다. SK온에서 배터리 사업을 진두지휘하던 최 수석부회장은 지난 6월 10일자로 SK이노베이션으로 이동해 SK그룹의 에너지·그린사업 전반을 총괄하게 됐다.SK이노베이션은 SK그룹 에너지 분야를 대표하는 중간지주회사로 SK에너지, SK지오센트릭, SK온, SK엔무브, SK인천석유화학,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SK아이이테크놀로지, SK어스온, SK엔텀 등 9개 사업자회사를 두고 있다. 최 수석부회장은 그동안 맡고 있던 SK그룹 수석부회장과 SK E&S 수석부회장은 계속 겸임하며 그룹 내 미래 에너지 사업의 통합 시너지를 창출해내는 중책을 맡게 됐다.
유정준 SK미주대외협력총괄 부회장은 최 수석부회장 후임으로 SK온 부회장으로 이동했다. 유 부회장은 글로벌통이자 에너지 전문가로 최 수석부회장과 함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으며 SK E&S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최 수석부회장은 SK이노베이션의 에너지·그린 사업을 총괄하며 중장기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하게 될 전망이다.
SK그룹이 최 의장 주도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최적화하기 위한 ‘리밸런싱’ 작업을 진행 중인 가운데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설도 나오고 있다. 그룹 사업의 양대 축 중 하나인 그린·바이오 사업에서는 ‘질적 성장’을 위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출범 이후 적자가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막대한 투자금이 필요한 ‘SK온 살리기’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보인다. 배터리 사업의 초기 단계부터 이끌어온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모회사로 이동한 것도 이 같은 통합을 염두에 둔 인사라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SK이노베이션과 SK E&S 모두 SK(주)가 대주주라는 점에서 지배구조상 합병이 가능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SK그룹·SK이노베이션·SK E&S 세 곳에서 수석부회장을 겸임하고 있고, 이번 인사로 에너지·그린 사업을 총괄하게 되면서 SK온에 있을 때보다 중장기 전략에 따라 큰 폭의 사업조정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최재원 수석부회장과 유정준 부회장이 SK E&S 공동대표를 맡아 사업에 이해도가 높은 만큼 합병이 진행된다면 최 수석부회장과 유 부회장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다만 합병 등의 사안은 이사회와 임시주주총회 등을 거쳐야 하는 데다 주주들의 반발 등이 예상되는 만큼 여러 방안을 놓고 내부적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은 6월 20일 SK E&S와의 합병설에 대해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합병 등 다양한 전략적 방안을 검토 중이나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주력·신사업 현금창출력 약화…골든타임 왔다
SK온은 전기차 수요 부진 등으로 지난해 5818억원의 영업손실을 냈으며 올해 1분기에도 영업손실 3315억원을 기록해 9개 분기 연속 적자를 이어갔다. 시장에서는 2분기에도 2000억원대 적자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SK온은 올해 미국, 유럽 등 글로벌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7조5000억원의 규모의 설비 투자도 예고돼 있다. 이에 따라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의 재무 부담도 커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부채는 2020년 23조396억원 수준에서 SK온의 설비투자 확대에 따라 지난해 50조7592억원으로 3년새 2배 이상 확대된 바 있다.
SK온의 투자금 확보를 위해 SK온을 SK엔무브와 합병한 뒤 상장하는 방안,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지분을 매각하는 방안 등도 거론됐으나 주주 반발 등 현실적인 문제로 사실상 보류 된 것으로 전해진다.
최 수석부회장과 유 부회장이 SK이노베이션과 SK온으로 이동한 뒤 각 계열사의 체질 개선 작업이 빨라지고 있다.최근 SK온은 최고사업책임자(COO)를 신설하고 영입했던 포드 출신의 성민석 부사장을 보직 해임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8월 영입한 지 10개월 만이다. 최근 포드의 전기차 판매량 감소 등으로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조직 재정비와 후속 인사도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1.4조 재산분할 위기 속 ‘SK 정신’ 강조
이번 최재원 수석부회장과 최창원 의장 등 오너일가의 등판을 두고 책임경영 강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적자를 내는 사업과 계열사가 그룹 구조조정 수술대에 오르내리며 직원들의 불안감도 커졌다. SK온에서는 인력 이탈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최태원 회장의 이혼소송 판결로 내부 분위기도 뒤숭숭하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남았으나 2심 판결대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재산분할하게 될 경우 SK그룹의 지배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한 판결문에 ‘SK그룹 성장이 불법적인 비자금을 통해 이뤄졌다’, ‘제6공화국 후광으로 사업을 키웠다’는 내용이 포함되며 임직원들의 동요와 그에 따른 사기 저하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최 회장은 이혼소송 판결 이후 사내포털망에 ‘구성원에 전하는 편지’로 사과하며 “지난 71년간 쌓아온 SK 브랜드 가치, 그 가치를 만들어온 구성원의 명예와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며 “SK와 구성원 모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실을 바로잡겠다”고 강조했다.이 같은 상황에서 오너일가의 등판은 거듭된 적자에도 배터리 사업에 대한 흔들림 없는 의지와 위기 극복 의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SK그룹은 6월 28일과 29일 경기도 이천 SKMS 연구소에서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가 참석하는 경영전략회의를 열어 사업 리밸런싱 방향성과 함께 SK그룹 고유의 경영 철학인 SKMS 기본정신 회복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SK그룹은 사업 리밸런싱에 속도를 내기 위해 기업문화 회복이 필요하다고 판단, SKMS 기본정신을 회복하는 것을 화두로 삼은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