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 4주기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되고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다. 나부터 바꾸자.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해외 출장 중이던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삼성 임원 200여명을 소집했다.
해외를 돌며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삼성의 한계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경영진들에게 위기의식 중무장과 뼈를 깎는 혁신을 주문했다.
이른바 '신경영 선언'으로 알려진 이 선대회장의 불호령 이후 삼성은 대대적인 변화와 혁신을 통해 한국을 넘어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다.
양적 경쟁에서 벗어나 우수한 품질로 경쟁력을 높여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자는 이 선대회장의 반성과 위기의식이 성장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반도체·휴대폰 1등 사업 키운 저력… 배경엔 '위기의식'
1942년 1월9일 경남 의령에서 고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3남5녀중 3남으로 태어난 이 회장은 1987년11월19일 별세한 선친의 뒤를 이어 그해 12월1일 삼성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27년 간 회사를 이끌며 남다른 선구안과 투자를 바탕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반도체 사업이다. 이 선대회장은 1974년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반도체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자원이 없는 한국이 첨단 기술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고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까지 내면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뚝심으로 투자를 밀어붙였고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과감한 투자를 지휘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1984년 64M D램을 개발했고 1992년 이후로는 줄곧 세계 메모리 시장 왕좌를 지켜오고 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D램 점유율은 42.9%, 낸드플래시 점유율은 36.9%로 세계 1위이다.
'애니콜 화형식' 역시 위기를 기회로 만든 일화로 꼽힌다. 당시 삼성전자가 선보였던 휴대폰 '애니콜' 초기제품의 불량률이 11.8%에 달하자 이건희 선대회장은 임직원 2000여명을 구미사업장 운동장으로 소집해 15만대의 휴대폰을 불태웠다.
'휴대폰 화형식'은 삼성전자의 '품질경영' DNA를 각인시키는 계기이자 피처폰인 애니콜에서부터 스마트폰인 갤럭시에 이르기까지 삼성전자 모바일 신화를 쓰는 초석이 됐다. 올해 2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18.3%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고 폴더블폰, AI 스마트폰 등을 업계 최초로 출시하며 새로운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신경영선언 직전까진 D램과 메모리반도체 2개 분야에서만 세계 1위 제품을 갖고 있었던 삼성은 현재 TV, 모니터, 반도체용 기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1위 품목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의 외형과 가치도 크게 늘었다. 이 선대회장 취임 당시 10조원이던 매출은 2022년 400조원 시대를 열며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섰다.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도 올해 첫 1000억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5위를 수성하고 있다.
근본적 혁신 강조… 이 선대회장 유산 현재까지 이어져
이 선대회장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난 상황에서도 늘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끊임없는 혁신을 주문했다. 2002년 4월에는 전자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마하경영' 이론을 꺼냈다.
당시 이 선대회장은 "제트기가 음속의 두 배로 날려면 재료공학, 기초물리, 화학 등 비행기를 제조하는 모든 엔지니어링이 바뀌어야 한다"며 "마하로 진입하기 위해 전체 소재를 바꿔야 하듯 이제 사고 방식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선발에 차이고 후발에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삼성이 무한경쟁 시대의 위기 속에서 글로벌 초일류기업이 되려면 체질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미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몇개월 전인 2013년 10월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도 이 선대회장은 "앞으로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며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 바 있다.
이 회장은 2020년 10월25일 향년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하지만 고인이 생전 중시하던 국가경제 기여, 인간 존중, 기부문화 확산 등의 가치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삼성은 여전히 국내 1위 기업으로서 글로벌 경기침체 장기화 속 경제회복을 위한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사회약자를 지원하는 사회공헌 사업도 더욱 탄탄하게 계승·발전시켜 난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 미술계 발전을 위해 이 선대회장이 평생 모은 문화재·미술품 2만3000여점을 국가기관 등에 기증했고 감염병 극복 지원과 소아암 희귀질환 지원 등 의료공헌에도 1조원을 기부하는 3대 기증사업은 'KH 3대 유산'으로 남아 재계와 사회에 귀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