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부터 1969년 버핏의 삶과 재산
연도 | 나이 | 재산 | 내용 | 현재 (물가 3.45%) |
원화환산 (환율 1,200원) |
1930 | 0 | 8월 30일 출생 | |||
1936 | 5 | $0 | 껌, 콜라 판매 | ||
1936 | 6 | $20 | 현금출납 기록 시작 | $345 | ₩414,546 |
1937 | 7 | <채권 판매> 책 읽음 | |||
1939 | 9 | 골프공 판매 | |||
1940 | 10 | - 땅콩과 팝콘 판매, 주식 관련 독서 시작, 월스트리트 견학 - <천 달러를 버는 천 가지 방법> 책 탐독, 복리 개념 이해 - 35살에 백만장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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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 11 | $120 | 첫 주식(시티즈 서비스) 구매 | $1,691 | ₩2,029,276 |
1942 | 12 | 주말에 할아버지의 가게 도움(육체노동), 폐지 판매, 가출 | |||
1943 | 13 | 신문 배달 시작 | |||
1945 | 15 | $2,000 | - 40에이커 농구 구입($1,200) - 신문 배달에 잡지를 추가해 1달러에 $175수입(선생님보다 고소득) - 우표수집 판매, 세차, 캐디 등의 활동 병행, 소득세 내기 시작 - 이발소에 핀볼머신 사업, 고교졸업 전에 $1,200에 판매 |
$25,458 | ₩30,549,096 |
1947 | 17 | $5,000 | 고교졸업 | $59,470 | ₩71,363,704 |
1948 | 18 | 50명의 신문 배달부를 관리하는 매니저가 됨 | |||
1049 | 19 | $9,800 | - <현명한 투자자> 읽음, 컬럼비아 대학 입학 - 가치투자 시작(파커스버그 리그 앤드 릴 200주 매수) |
$108,916 | ₩130,699,061 |
1951 | 21 | $19,738 | - 주식 중개인으로 아버지 회사에서 일함 - $5,000 대출받아 투자 |
$204,978 | ₩245,973,627 |
1954 | 24 | $35,000 | 그레이엄- 뉴먼 입사 | $328,307 | ₩393,968,919 |
1956 | 26 | $174,000 | 오마하로 귀향, 5월 5일 버핏 어소시에이츠 설립 | $1,525,109 | ₩1,830,130,987 |
1960 | 30 | $1,000000 | $7,652,965 | ₩9,183,557,428 | |
1962 | 32 | $1,807,600 | 버핏 파트너십 통합 | $12,926,205 | ₩15,511,446,126 |
1963 | 33 | $2,400,000 | $16,590,117 | ₩19,908,140,765 | |
1967 | 37 | $10,000,000 | $60,355,414 | ₩72,426,497,107 | |
1969 | 39 | $25,000,000 | 버핏 파트너십 청산 | $140,992,254 | ₩169,190,704,892 |
11살(생일이 지나지 않은 1942년)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고객들에게 권유하던 주식 시티즈 서비스 우선주를 $38.25에 본인 3주, 누나 도리스 3주, 아버지 4주, 총 10주를 구매했다. 하지만 도리스는 학교에 갈 때마다 주식 가격이 떨어진 것에 불평했고, $27까지 떨어졌다가 매수가 보다 조금 더 오른 $42에 모두 팔았는데, 2년 후에는 그 주식이 202달러가 넘었다. 이 일로 버핏은 눈앞의 작은 이익으 덥석 잡으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의 돈을 맡아 투자할 때는 먼저 스스로가 그 주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이미 신문 배달을 통해 학교 선생님의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었고, 작은 농장도 사서 국가에 소득세를 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직후 자산이 현재가치로 7천만 원을 넘었다.
19살때 스승 그레이엄이 가르치는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는 이미 순자산이 현재 가치로 1억 원을 넘겼다. 연봉 3천만 원이라 가정하면 매달 실수령액이 대략 230만 원내외다. 아끼고 아껴 최저생활비로 100만 원 정도만 쓰고 130만원을 저축한다고 하면 1억 원을 모으는데 약 6.4년이 걸린다. 우리가 35~45세에 할 수 있는 일을 버핏은 충분한 사업 경험과 투자에 대한 지식을 갖추며 단 19살에 끝냈다.
1949년에 그레이엄이 쓴 <현명한 투자자>를 읽고 주식투자에 새로이 눈뜨게 된다. 버핏은 스승이 가르쳐준 투자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1956년까지 시장이 연평균 22.35% 증가할 때 연 평균 61.5%의 속도로 자산을 불려나가, 26살에는 현재 가치로 약 18억 원에 가까운 돈을 모았다. 무려 시장을 40%p 가까이 이긴 것이다.
1951년 칼럼비아 대학에서 <증권 분석> 과 <현명한 투자자>를 쓴 그레이엄을 만나 그에게서 직접 가치투자를 배우고 나서 그레이엄의 회사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버핏은 다시 고향인 오마하로 돌아와 부친의 주식 중개 회사인 버핏-포크에 입사해 주식 중개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1954년 스승인 그레이엄의 호출로 뉴욕으로 돌아와서 그레이엄이 세운 투자조합인 그레이엄-뉴먼에 입사해 스승과 함게 일하며, 가치투자의 구체적인 방법을 현실에 접목하는 동시에 자신의 돈도 함께 불려나갔다.
1956년 그레이엄이 61세가 되어 은퇴하면서 그레이엄-뉴먼 사가 해체되고 버핏은 뉴욕을 떠나 고향 오마하로 돌아왔다.
전설의 시작 - 펀드매니저
그레이엄에게 배운 지식을 가지고 버핏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약간의 돈($100)과 7명의 주주인 누나 도리스와 남편 트루먼 우드($10,000), 고모 앨리스 버핏($35,000), 장인 톰슨 박사($25,000), 대학교 룸메이트 척 피터슨($5,000)과 그의 어머니 ($25,000), 그리고 변호사이자ㅏ 친구 댄 모넨($5,000)의 돈을 합쳐 $105,000를 모아 주식회사 형태의 조그만 펀드를 시작했다. 5년 뒤인 1961년 총자산은 약 700만달러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고, 조합원 수는 7명에서 90명으로 늘어났다.
버핏은 수수료로 챙긴 돈(버핏이 달성한 수익이 30%일 경우 매년 수익의 6%를 받았다)을 모두 자기가 운용하는 펀드에 재투자했다. 이렇게 버핏이 첫 100만 달러를 번 방법은 지금의 해지펀드 같은 펀드를 운용한 수수료를 통해서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종잣돈 1억원을 만들었고 그 1억 원을 가치투자를 이용해 복리로 굴려 5년 동안 매년 60%씩 18억 원으로 불려나갔다.
수익이 25%만 가져가는 버핏의 파트너십은 나중에 고객의 돈을 거의 무이자로 가져와서 수익을 불려가는, 버핏이 보기에 당시의 펀드 형태보다 더 나은 구조인 보험업으로 변신했다. 이것이 잘 알려진 섬유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다.